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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바위와 돌에 새겨진 傳說과 由來石

高山 | 2009.08.12 14:55 | 공감 0 | 비공감 0

 

예부터 전해오는 바위와 돌에 새겨전설과 유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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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여 년 전의 해석이 안압지에서……

        - 신라인들이 애석하던 바닷돌 -1

 

천여 년 전 신라인들이 완석으로 소유하던 돌들이 발견되었다. 674년에 조성되었다는 사적 18호 안압지를 문화재관리국이 1975년에 발굴, 복원 공사를 했다. 안압지 바닥에 쌓인 흙을 뒤집어 걷어내며 문화재를 찾았다. 3만 3천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던 중에 바닷돌이 여러 점 발견되었다.

 

안압지에서의 바닷돌 발견은 우리 수석계의 획기적인 자료이다. 우리 조상들이 수마석을 완상하고 감상했다는 사실이 천이백년 이전임을 알려주는 현품이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먼 옛날 해변을 거닐던 신라인들이 물에 곱게 씻겨 형성된 바닷돌에 매료되어 그것을 주워 경주에 있는 성 안으로 가져온 것이라 생각된다.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대동소이 할 것이다.

아름다운 바닷돌의 선과 문양에 넋을 잃고 감상하다가 안압지에 떨어뜨렸거나 물에 잠기게 해서 감상했을 수도 있다. 안압지 출토 바닷돌에는 문양석이 많다. 그러나 문헌의 기록이 없고 전래되는 이야기도 없다. 하지만 안압지에 묻혀 천년을 기다린 해석은 신라인들의 완석임에는 틀림없다.

 

그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다양한 색을 가진 고운 돌들이 대부분이다. 신라인들이 해석을 감상석으로 옮겨왔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나 옮겨왔다는 개념보다 호주머니에 넣어 만지며 왔을 가능성이 높다. 안압지 출토 해석은 옛사람들의 수마석을 가장 멀리 옮긴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 천이백년 전에는 돌을 생활도구나 방패로 사용하지 않았고, 특히나 신라인은 돌을 쪼고 다듬어 탑이나 불상 같은 종교적인 신앙심으로 승화시켰다.

 

안압지의 해석은 문양석 종류이다. 천년 이상을 품고 있다 그 모습을 드러낸 수석의 타임캡슐이 안압지인 것이다. 경주 근교의 바다를 둘러보자. 현재의 안압지 해석 같은 문양석이 보이는 석질은 경주시 양남면 봉길리와 나아리가 있고 더 남쪽으로는 양남면 하서리 해변의 돌들이 동일 석질이다. 울산광역시 북구 신명동과 호암동 해변이나 염포동 해변석도 같은 계통이다.

 

안압지 해석 발견이 수석의 타임캡슐이 되었기에 안압지를 들릴 때면 생각하게 되는 것이 많다. 천년하고도 먼 옛날 비록 ‘수석’이라는 말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우리 선인들이 물씻김돌을 완석하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흥의 正四品 舍人岩

3장흥과 강진의 경계에 정사품 벼슬 이름의 사인암이 있다. 주민들이 새암바위라고도 하는 이 바위는 원래 눈바위라 했다. 그러나 조선 단종조에 사인 벼슬을 지내던 김필이 낙향해 이곳 바위에 정각(亭閣)을 짓고 어린 단종이 오직 무사하기를 빌며 망배사군(望拜思君)했기 때문에 후세에 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바위는 단애가 70m 이상이고 앞에 섬진강이 흘러 경관이 좋다. 이 바위 절벽 아래에 폭과 깊이가 각각 2m의 굴이 뚫려 있고 이 굴 앞에 높이 15m 가량의 바위가 서 있다. 멀리서 보면 음부와 양근(陽根)으로 보인다.

 

이 때문인지 자식 없는 여인들이 새벽기도를 하고 굴천정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아 마시는 풍습이 있다. 이 바위는 장흥 송암리에 있고 읍 중심부에서 10리 거리이며 전라남도 지정문화재 제 55호인 사인정이 있다.

 

연화도(蓮花島)의 유래석‘둥근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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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에 연화도인이 수도했던 곳으로 알려진 토굴

 

연화도는 한려수도의 중심지인 충무시에서 12km 떨어진 통영군 연화리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 근래에 연화도의 내력과 연화도인의 입적(入寂)햇던 자리, 둥근 돌이 함께 발견되어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다.

 

연화도에서 발견된 전래석인 이 ‘둥근 돌’은 길이가 13cm이고 높이 33cm, 폭이 8cm의 누런 바탕의 화강암질이다. 말없이 까마득하게 잊을 뻔 했던 이 둥근 돌은 언제 누가 모셔 놓았는지, 연화도의 이름의 유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막연하게 어느 고승이 이 곳 토굴에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올 뿐이다.

이 섬에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있었던 전설이 있다. 당시에 연화도인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현인과 고승이었던 사명대사가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때부터 토굴에는 부처님처럼 모셔오던 타원형의 바닷돌이 오늘날까지 남아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두 사람 중 누가 바닷돌의 주인이었는지 알 수 없었는데 근래에 와서 사명대사가 주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 이유는 사명대사의 동문인 부휴선사의 알돌과 얽힌 탄생설화 때문이다. 부휴선사의 부모가 자식이 없어 걱정하다가 길가에 굴러다니던 둥근 돌을 가져다 모시고 치성을 올린 끝에 부휴선사를 얻게 되어 돌의 신비함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욕심과 무지로 깨틀어진 어석(魚石)의 전설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4년(서기 636년)때의 이야기 한 토막이다. 그 당시 라(羅)? 당(唐) 사이에 오고간 사신의 기록을 보면 두 나라사이의 교역이 매우 활발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이야기는 민간 전설의 한 부분이다.


경주에 김묵(金?)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당의 사신이 김묵의 집 돌담 앞을 자나다가 짚신 끈이 풀어졌다. 말에서 내린 사신이 짚신 끈을 고쳐 매고 다시 말에 올라타려고 일어서며 무심코 뒤를 보게 되었다. 그 때에 돌담에 끼어있는 푸른빛이 감도는 한 돌에 시선이 멈추었다.

사신은 황급히 그 돌 앞에 가서 유심히 살펴본 후 그 집 주인을 찾았다. 그리고 김묵을 보고,

“당신 집 돌담에 있는 저 돌을 나에게 양도할 수 없겠소?”

하고 공손히 말했다. 김묵이 답하길,

“드려도 좋겠지만 그 돌을 빼낸다면 담장이 무너지지 않겠소?”

라며 줄 듯 안줄 듯 한 태도를 보였다. 김묵의 속셈으로는 몇 푼만 준다면 쾌히 승낙을 하겠는데 그냥 돌만 달라고 하니 무너진 돌담 처리는 누가 하느냐는 말이다. 그러자 당 사신이 선뜻 하는 말이, “백 냥을 드리면 돌을 줄 수 있습니까?”

 

이쯤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아무리 당인(唐人)이라 할지라도 물가나 시세를 모를 리 없을 텐데 백 냥이나 준다 하니 김묵의 생각이 달라졌다. 결국 역효과가 나타났다.

저 돌 한 개에 서슴지 않고 백 냥을 준다 하니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기왕이면 중국사람 돈으로 팔자 한번 고쳐볼까 하는 심산이 생기자 배짱이 생기고 말았다. 김묵이 담뱃대를 툭툭 털며 먼 산을 바라보고,

 

“돈 천 냥이나 준다면 모르겠소마는...”

당인(唐人)은 흥정을 할 줄 모르고 두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40고개에 상처한 사람마냥 돌담의 푸른 돌만 다시 보고는 말을 타고 가버렸다.

 

당 사신이 길모퉁이를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김묵이 돌담에서 그 돌을 빼내어 마당 한가운데에 놓았다. 대관절 두말없이 백 냥을 준다하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앞을 보고 뒤를 보면서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납득이 가지 않았다.

혹시 돌 속에 금이라도 있는가? 모르는 사람에게는 ‘돼지에 진주’라는 속담이 있다. 김묵이 얼마나 초조하고 궁금했든지 마침내 그 돌을 두드려 깨어버렸다. 그러자 두 동강이가 난 돌에서 물이 쏟아지고 그 속에서 금이 아닌 금붕어 두 마리가 튀어 나오더니 이내 **버렸다.

그 이듬해 당인(唐人)이 또 다시 김묵의 집을 찾아왔다.

 

“당신이 달라하는 천 냥을 가져왔으니 그 돌을 주시오.” 하고는 전대를 말에서 내려놓으며 하는 말이, “고향에 돌아가서 그 돌을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고 돈을 구하느라 늦었소이다.”

이 말을 듣고 돈 뭉치를 바라본 김묵은 환장할 지경이었으나 돌은 이미 깨지고 그의 꿈도 사라졌으니 그간의 사정 이야기나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당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김묵의 무지함과 자기의 불민함을 한탄했으나 죽은 자식 나이세는 격이었다.

기가 막힌 당인이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원망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돌은 당신이나 내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다시는 볼 수 없는 명석(名石)인데... 당신이 그 돌을 깨었을 때 두 마리의 금붕어가 나오지 않았소?” 하고는 5대 독자(獨子) 죽인 것보다 더욱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 돌을 두고두고 닦고 닦으면 그 돌 자체가 투명하게 되어 돌 속에서 금붕어가 놀고 있는 모양이 보이게 될 것이오. 그 모습을 조석(朝夕)으로 바라볼 것 같으면 사람이 불로장생(不老長生)한다는 ‘魚石’이란 말이외다. 그런 명석을 아무리 무지한 사람이로기서니 부셔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소. 그 돌은 천 냥이 아니라 십만 냥으로도 살 수 없고 구할 수도 없는 돌이란 말이오!”

 

이 말을 듣고 김묵이 실신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馬孝子의 怪石과 어전(魚箭)

장흥 마씨의 중시조격인 마천목이란 인물이 1400년대에 섬진강 중류인 순자강에서 명석을 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마천목은 1358년(고려 공민왕 7년)에 장흥에서 태어나 곡성군 오산면 오지리에서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심이 대단했다. 아버지가 물고기를 좋아하여 매일같이 마을 앞 순자강에 나아가 고기를 잡아 대접했다. 이 순자강 물은 전북 마이산에서 흐르기 시작한 물이 남원을 거쳐 구례 동방천을 이루고 하동으로 빠져 사실상 섬진강이지만 곡성 사람들은 이렇게 부르지 않을 뿐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강에서 민물고기를 잡아 아버지를 봉양해 그를 마효자라 불렀다. 하지만 매일 고기 잡는 일이 쉽지 않았던 그는 강을 막아 물목에 살(箭: 화살)을 장치하였다. 그렇지만 물이 새고 강폭이 100m를 넘어서 그리 쉽지가 않았다. 고기를 잡던 어느 날 그는 보통의 돌과 달리 검푸르고 어찌 보면 빛을 내는 것과도 같은 이상한 돌을 발견했다.

 

 

마천목은 이 돌을 무심히 지나칠 수 없어서 품에 안고 집에 돌아왔다. 이날 밤 자정이 되어 마천목은 잠결에 집 주위가 소란하여 밖에 나가 보았다. 그의 집 주위에는 수십의 도깨비가 둘러서 있고 그 중 대장인 듯 한 도깨비가 마천목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대감님 저희는 순자강 범실골에 사는 도깨비들입니다. 대감께서 낮에 고기잡이 나와 주어온 돌이 사실은 저희들의 수령입니다. 돌로 화신해 있었는데 마대감 눈에 띄어 잡혀온 것입니다. 돌려주시기만 한다면 대감께서 원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라며 애원했다.

 

마천목은 당시 나이 20세도되지 않은 소년이었으나 대담하고 지혜가 뛰어났다.

“너희는 아직 과거도 보지 않은 나를 대감이라고 부르니 당치 않다.

 

너희가 필시 나를 놀리는 것이니 가만 둘 수 없다.” 라며 호통을 쳤다. 대장 도깨비는 머리를 조아리며 “대감은 아직 나이 어려 이곳에 있으나 곧 대감이 될 것이고 부원군 벼슬에 오를 것이니 대감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흐뭇한 마음이 든 마천목은 “그러면 내가 아버지 봉양하는 고기잡이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알 것이니 오늘밤 안에 순자강에 나아가 강을 막고 어전을 만들어 놓으면 너희 수령을 내어주마.” 라고 제안했다.

 

도깨비들은 그런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라며 물러가더니 잠시 후에 돌아와,

“이미 다 만들었으니 가서 살펴주십시오.”라 보고했다.

 

마천목은 도깨비들의 안내를 받아 순자강에 나가보니 오지리에서 3km 가량 구례로 내려가는 두계 나루터 위에 훌륭하게 돌로 둑을 쌓고 한쪽으로 물이 흐르도록 해 놓았다. 물고기들은 이 물을 따라 모조리 대발 속에 갇히도록 해 놓았다.

 

마효자는 기분이 좋아 즉시 집에 돌아와 낮에 주어온 돌을 돌려주고 도깨비들이 좋아한다는 메밀죽을 쑤어 대접하면서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런데 메밀죽이 모자라 늦장을 부린 한 도깨비만이 그 맛을 보지 못했다. 아 도깨비가 돌아가는 길에 심술로 뚝 한쪽을 허물어버렸다. 육백여년 전 도깨비들이 만들었다는 이 어전에는 대발은 없지만 오늘날도 그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마천목은 이 일이 있은 뒤 산원(무관)에 등용되고 고려말에 대장군이 되었으며 이성계와 이방원을 도와 동지절제사 벼슬에 올랐다. 74세에 죽었는데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곡성 성황신(城隍神)이 되었다. 오늘날도 이 어전터는 도깨비 어전 혹은 마효자 어전으로 불리며 은어가 잡히고 있다.

 

설악산에 울산바위가 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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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바위의 거대하고 웅장한 경관

 

늘 눈이 덮혀 있어 설악이라는 설악산은 분수령을 중심으로 동해쪽을 외설악이라 하고 백담사 쪽을 내설악이라 한다. 외설악의 신흥사에서 언덕 하나를 올라가면 어마어마한 암석이 앞을 막는데 이것이 바로 울산바위라 불리는 암산(巖山)이다.

산이라기에는 통이 한 덩어리의 바위로 되어있고 바위라기에는 너무도 큰 이 울산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본래 이 바위는 경상도 울산에 있었는데 조물주가 강원도 땅에 천하의 명산 하나를 만들되 산봉의 수룰 꼭 1만 2천으로 할 계획이었다. 각 지방에서 웅대하여 남의 눈을 끌만한 산에게 자신이 있거든 금강산 쪽으로 오면 각기 그 용모에 맞는 자리를 줄 것이라 했다. 이에 각지에 흩어져 있는 많은 산들이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모두 모여들었다.

 

이때 경상도 울산에 둘레가 10리나 되며 웅장하기로는 이 마을 최고인 울산바위도 이 소식을 듣고 인근 산봉에게 알리기를, “나는 본래 암산의 왕자로 자질구레한 너희들하고 같이 있을 처지가 아닌데 어쩌다 이 곳에 있게 되어 오늘날까지 빛을 보지 못하고 지냈다. 하지만 이제 조물주가 천하의 명산을 만든다 하니 내 있을 곳이 바로 그곳이라 나는 곧 여기를 떠나겠다.” 라 하고 울산을 떠났다.

 

 

길에 나서 태백산령을 걸어오는데 워낙 몸집이 육중하여 빨리 걸을 수 없었다. 온 힘을 다하여 부지런히 걸었으나 설악산까지 오니 힘이 들어 쉬지 않을 수 없었다. ‘빨리 가야 좋은 자리를 차지 할 것인데.’라며 조바심이 일지만 힘이 다하여 하루를 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쉴 자리를 골라보니 외설악 수석이 좋기에 이곳에 쉴자리를 마련했다. 이곳에서 하루를 머문 뒤에 다음날 다시 육중한 몸을 이끌며 마침내 금강산 어귀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미 금강산은 다른 바위들도 다 채워진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물주를 찾아갔다.

울산바위가 조물주와 대면하여 말하기를,

 

“보시다시피 제 몸집이 유난히 거대하여 걸음을 빨리 걸을 수 없어 좀 늦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 웅대한 모습은 금강산의 주역 노릇을 할만할 터이니 주역자리를 하나 마련해 주십시오.”라 했다. 조물주는 울산바위의 용모를 살피더니, “이만하면 족히 금강산의 주역 노릇을 할만하나 아깝게도 시간이 좀 늦어 앉을자리가 없으니 산록에 가서 단역이나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라 말했다.

 

울산바위는 이 말을 듣고,

“체면이 있지 내가 이 체통으로 어찌 금강산 단역 노릇을 하겠습니까? 자리가 없어 주역을 못할 바에야 차라리 나는 되돌아가겠소.” 하고 홧김에 분별도 없이 그 곳을 떠나 귀로에 올랐다. 그런데 돌아오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울산을 떠날 때 동료 산봉들에게 큰소리를 쳤는데 이대로 돌아가면 웃음거리 밖에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돌아갈 수도 없거니와 금강산에 다시 가서 단역 자리라도 달라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때 문득 떠오른 곳이 설악산의 산수요 어젯밤 쉬던 그 자리였다. 금강산만은 좀 못할지 모르나 금강산에서 단역을 맡는 것 보다는 외설악의 주역을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을 다지고 다시 찾아 앉은 곳이 지금의 울산바위라는 것이다.

 

 

이 울산바위는 둘레가 10리나 되는 암산으로 흔히 바위라고는 하지만 바위라기보다는 거대한 암산이다. 높이가 수백 미터나 되어 그 웅대한 위용은 아무데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바위가 아니다.


쌍계사의 제수마석(除睡魔石: 잠 쫓는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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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수마석(除睡魔石)이라 불리는 둥근 돌

 

 

광활선사라는 분은 1680~1741년 사이의 고승인데 이 분은 원래 글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쌍계사에 머무르며 부엌일과 아궁이에 불 지피는 일을 하면서도 염불을 쉴 새 없이 외우고 있었는데 쏟아지는 잠은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잠이 올때마다 둥근 돌을 등에 지고서 칠불암까지 걸어갔다 오고는 했다. 그러기를 천일이 되던 날 온몸에 물집이 터지고 혼절한 끝에 대각(大覺)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도 필불암에 머물던 추월(秋月) 스님이 어깨에 메고 다니다가 쌍계사 주지실에 모셔두었는데 지금은 육조혜능탑 앞에 모셔져 있다.


가래바위(美人岩)의 전설 7

장성의 미인암

 

가래바위는 노화(蘆花)와 연관된 전설을 지니고 있다. 노령은 예부터 산갈대가 많은 고개로 고갯길이 길고 험하기 때문에 산매도 쉬어 넘는다는 고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고개에는 주막이 있었는데 장성 쪽 원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주막에는 마마를 앓아 얼굴이 아주 못생긴 주모가 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과객들이 거들떠보지 않아 처녀귀신이 될 처지였다. 이것이 한이 되어 살아가던 이 주모는 예쁜 딸을 낳아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룻밤을 묵어 간 도승으로부터 원덕 건너 처용암에 정성들여 기도 올리면 예쁜 딸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다음날부터 이 주모는 도승이 일러준 대로 매일 새벽에 처용암을 찾아가 기도했다. 100일째 기도하던 날 주모는 처용암 옆 갈대숲을 헤치고 예쁜 딸아이가 자기 품에 안기는 환상에 잠겼다. 이날 밤 주모는 기도한 영험이 있었던지 이름도 성도 모르는 소금장수와 정을 맺어 열달만에 예쁜 딸을 낳을 수 있었다. 딸이 태어나던 날 온 집안에 갈대꽃이 날아들어 아기를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주모는 이처럼 갈대와 인연이 많은 이 아이의 이름을 ‘갈아기’라 불렀고 한자로는 ‘蘆花’라 썼다. 이 아이가 후에 자라서 장성 고을의 원님들의 넋을 빼앗아간 명기 노화가 되었다. 처용암은 갈아기바위라 부르다 가래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야사로는 이조좌랑으로 있던 노계명이 이 노화의 치죄(治罪) 임무를 띠고 장성 갈재를 넘다가 노화의 꼬임에 빠져 죄를 묻기는커녕 그녀를 소첩으로 삼았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이곳 장성을 중심으로 전해오는 가래바위의 노화는 비명에 간 것으로 되어있다. 노화는 자라면서 그의 어머니와는 달리 절색이었으나 조막을 지키는 여인이 되어야했다. 이곳을 지나는 과객들은 대부분 노화를 보고 혼을 빼앗기고 말았다. 특히 이 주막은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는 젊은이들이 많이 지나치는 길목에 있었다. 이 젊은이들은 대부분 노화를 보고 과거를 포기하고 노자를 털어 내놓았다.

 

그래서 갈재 이남에 사는 부모들에게는 여우와 같은 존재가 되고만 노화는 결국 조정에까지 그 피해가 알려져 처형 명령이 내려졌다. 왕명을 받들고 내려온 장수가 노화를 한칼에 죽였다.

이 때 칼이 한쪽 눈을 내리쳐서 미인암이 오늘날 애꾸눈으로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갈아기인 노화는 이때 죽으면서 피를 흘렸는데 이 피가 가래바위 뒷산을 물들여 지금도 이 산은 붉은 빛이 돈다고 한다. 내를 따라서 흐르던 피는 황룡강에 사는 고기가 되었다. 이 고기는 이곳 사람들이 가래고기라 부르는 고기로 오색 무늬를 띄어 매우 아름답다. 또한 미인암이 애꾸눈이 되면서부터 이곳 원덕 마을에는 지금도 간간이 애꾸눈 미인이 태어난다고 한다.


200년 묵은 거북石의 유래

內智異라 하면 전남 쪽의 지리산을 말하거니와 지리산 관광의 중심 입구인 구례에서 4km 쯤 국도를 따라 하동으로 남행하자면 토지면(土旨面) 오미동(五美洞)이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 유종숙씨 라는 분이 8대째 가보로 내려온다는 거북석을 소장하고 있다. 이 돌은 길이가 25cm이고 높이가 12cm이며 목의 길이가 3.5cm로 ‘거북형’인데 석질이 비교적 강하고 등에 흰색의 줄무늬가 힘줄처럼 솟아나 있다.

 

살피건대, 머리 부분은 일부 손질이 된 듯하나 얼핏 분간하기 힘들다. 유씨는 ‘崇禎紀元後 三丙申年五美洞 瓦家開基時 所出元耳’ 라 붓으로 쓴 목함에 이 돌을 담아두고 있는데 이 목함은 서기 1802년에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유씨 家 는 원래 1700년대에 대구 영천에서 살았으나 지리산 옥녀봉 밑에 금환낙지(金環落地) 터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유종숙 씨의 8대조 유이위(柳爾胃) 씨가 그의 아들 덕호를 1776년 이 곳에 보내 집터를 잡고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유이위 씨는 2년뒤 이곳의 인접지인 樂安에 현감(縣監)으로 부임해서 이 집을 완성시켰다.

 

원래 힘이 장사고 거구인 데다가 그의 아들을 시켜 지은 이 집이 50여 칸에 달해 뒤에 삼수부사(三水府使)가 되었을 때,

‘유이위는 구례에 궁궐을 지어놓고 반란을 꾀하는 인물’이라는 모함을 받았다고 한다. 유부사가 그의 아들을 시켜 지은 이 집은 이조 중엽에 지은 산지로는 보기 드문 집이라 하여 68년 11월 민속자료 제 8호로 지정되었다.

 

유씨 집안은 당시 풍수설에 옥녀봉에서 천상의 선녀 형제가 앉아 놀다 금지환(金指環)을 빠뜨렸는데, 그 금지환이 떨어진 자리를 찾아 집터를 잡으면 자손만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금환낙지 터는 잡지 못했으나, 집터를 닦던 중 ‘거북석’을 흙 속에서 발견, 이곳이야말로 금환낙지의 상대에 속하는 ‘金龜沒泥之地’라고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거북석’은 유씨가에서 소장한지 금년이 꼭 220년째인데 국내에 이렇듯 오랜 세월 동안 고히 모시고 있는 가보석이 또 있는지 궁금하다.

유씨가 집터에서 이 ‘거북석’을 발견하고서 이곳 일대는 풍수설대로 금환낙지 터가 분명하다고 하여 각지에서 거부들이 몰려들어 집을 짓는 통에 일제 중엽까지 이백여 호가 들어섰으나 근래에는 많이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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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년 묵은 유씨의 거북돌

 


 

月出山의 三動石 설화

9월출산은 해발 808.7m로 영암과 강진 사이에 있는 소금강(小金剛)이다.

 

백제 때에는 月奈山이라 하다가 통일신라 후 月生 또는 월출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 영암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던 구림에서 이 산을 바라보면 마치 달이 산에서 솟아오르는 듯 보여 이같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이 산의 최고봉은 천황봉이라 하고 이 봉에서 3km 거리의 서쪽 중봉을 구정봉(해발 738m)이라 한다. 이 봉은 동쪽에서 보면 3m 가량의 바위이지만 서쪽에서 보면 열 길 단애를 이루고 있다.

 

이 봉을 九井峯이라 하는 것은 20명쯤 앉아 놀 수 있는 최정상의 암반에 직경 30cm에서 2m 가량 되는 웅덩이가 아홉 개 파여 있고, 이 곳에 항시 물이 고여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이 구정봉 암반을 신령암이라고도 하고 삼동석이라고도 하며, 영암이란 郡名도 사실은 이 삼동성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암반에 오르면 암반이 세 번 흔들리기 때문이다.

옛날 구림에 유배되어 살던 어떤 장군의 부인이 유복자로 동차진이란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 겨드랑이에 새의 깃털을 달고 나왔다. 또한 백일만에 이빨이 났으며, 세 살이 되자 맷돌을 번쩍 들었다. 일곱 살이 되자 어른처럼 나뭇짐을 지고 다녔다.

 

사람들은, “분명 동차진은 아버지를 닮아 큰 장수가 될 것이다.” 라고 말했으나 그의 어머니는 남편 같은 불운한 장수가 되느니 평범한 촌부로 살아갈 것을 바랬다. 그러나 무술을 시키거나 공부시키는 것을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날 이 모자의 집 앞을 지나던 한 노인이 동차진을 보더니 “때를 만났더라면 나라의 큰 동량이 될 터인데 참으로 아깝다.” 라고 중얼거리며 그의 어머니를 찾아와 “저 아이를 가르치지 않고 저대로 두면 큰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니 내게 맡겨 공부를 시키지 않겠느냐?”라고 물었다.

 

외아들을 키우는 재미만으로 살아가던 어머니는 그대로 두었다가는 큰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말에 겁이 나 그 노인에게 아들을 맡기기로 했다. 동차진은 이 노인을 따라 금강산에 들어가 수도했다.

 

10년의 세월이 흘러 노인에게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 고향에 돌아왔다.

오랜만에 아들을 맞은 어머니는 아들의 공부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 시험해볼 양으로 무엇에 자신있는지를 물었다. 아들이 모든 일에 자신이 있다고 하자 어머니는 구림 밖에 성을 쌓으라 하고 자신은 그동안 밥을 짓겠다고 했다. 동차진은 월출산 바위를 던지고 발로 차며 성을 쌓았으나 어머니가 밥을 짓는 것보다 늦었다.

 

그러자 들고 있던 바위를 땅에 내동댕이치며 울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공부는 많이 했지만 아직도 자만이 남아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자중할 것을 충고했다.

어머니를 돕고 지내는데 북쪽 오랑캐들이 국경을 넘어와 나라 안이 난리를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어머니는, “네가 배운 것을 나라를 위해 쓸 때가 왔다.” 라며 출정을 권했다.

 

그러나 동차진은 그까짓 오랑캐는 여기 앉아서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구정봉에 올라서서 주문을 외웠는데 월출산의 돌이 하늘을 날더니 수 천리 밖 오랑캐 진지에 떨어져 박살냈다. 그러나 이때 하늘에서 옥황상제의 노기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이놈 동차진아. 네가 공부를 했으면 정정당당히 전선에 나가 싸울 일이지 너의 재주를 자만하여 쓰니 정련 너는 화를 불러일으킬 인물이다. 그리고 구정봉은 우리 딸들이 내려가 쉬는 자리거늘 그 곳에 앉아 사람죽이는 도술을 쓰다니 너는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이에 동차진은 크게 뉘우치며 그의 도술로 벼락을 맞았으나 아홉 번 때린 벼락을 이기지 못해 이곳에서 죽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 구정봉에는 구멍이 아홉 개 있고 물이 고여 九井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 구정봉이 움직이는 것은 동차진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 곳에 오르는 이들에게 자신과 같은 실수를 하지 말라고 흐느껴 울기 때문이라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삼동석은 움직이는 바위 세 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아직 바위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구정봉 전설을 삼동석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나라의 운명을 건진 평택 영웅바위

임진왜란 당시 작은 돌멩이들이 거대한 바위로 변해 싸움의 형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는데 그 공로가 가상하고 기특하다 하여 조정에서는 ‘영웅’이라는 호칭과 함께 옥관자를 내려보냈다.

경기도 평택군에서 만호리 방향으로 얼마정도 가다보면 태백산 줄기와 차령산맥이 맞닿는 지점을 지나가게 된다. 그 곳에서 역사와 함께 숨쉰 ‘바위’와 만나게 된다. 이 바위들의 형태나 주위 환경에서 예사롭지 않은 전설이 얽혀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이 지역이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땅으로 ‘부산현’이라 불렸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진위’로 불렸음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지역을 지도에서 보면 서울에서 삼남으로 내려가는 길목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 하윤은 이 지역을 가리켜 ‘길이 남과 북으로 통한다.’고 했으며 서거정은 ‘삼도의 요충이 되는 지점에 있다.’고 이 지역의 특성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온 지형적 특성과 함께 당시 격정의 세월을 말해주듯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바로 ‘영웅바위’이다.

 

이 바위에 얽힌 전설은 조선조 성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바위는 어느 대감의 정원에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높이 2m 길이가 30m나 되는 큰 풍랑이 일어 일순간에 정원을 송두리째 덮어버린 뒤 바다 한가운데 그 형태를 드러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 지역의 병사들과 민초들은 단결하여 왜적에 맞섰다. 전투가 한창 벌어지던 중에 병사들은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거대한 바위가 나타나 왜군의 진로를 막아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왜군의 진격을 차단할 수 있었다.

 

왜란이 끝난 뒤 이 사실이 점차 세상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이 바위의 공로가 가상하고 기특하다 하여 ‘영웅’이라는 칭호와 함께 옥관자를 내려 대대손손 그 뜻을 기리게 하였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하나의 일관된 傳言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국운이 일촉즉발을 다투는 상황에서도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민족적 자존심으로 나라를 구한 민초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이산에 백 여덟 개의 돌탑을 쌓은 이갑룡 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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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룡 처사는 1860년 전북 임실군 둔남면 둔기리에서 전주 이씨 효령대군 16대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준수한 용모에다 나이에 비해 성숙했으며 범상치 않은 언행으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더욱이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임종 직전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석 달을 더 사시게 했다고 한다.

 

또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출상 때까지 식음을 전폐했는가 하면, 3년 시묘동안 솔잎으로 연명하며 잠시도 묘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묘를 지키는 3년 동안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산의 영기를 가까이 하면서 시묘를 마친 그는 법도를 찾아 명산대천 순례의 길을 떠난다.

그때 나이 19세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니면서 그는 기울어가는 조선 말 이땅 민초들의 불행한 삶을 목격하게 된다.

 

효령의 피내림이었을까. 6년간에 걸쳐 그의 방황과 순례의 생활은 계속된다. 25세 되던 해 명산대천의 영묘함도 지울 수는 없었지만 어지러운 세상에서 중생을 구해내는 것이 급선무라 여겼다.

 

그는 儒彿仙에 바탕을 둔 용화세계(龍華世界)의 실현이 이상적이라고 믿고 마이산에 들어가게 된다. 산신의 선몽으로 마이산에 들어간 그는 맹수와 독충이 들끓는 돌산 언덕 아래에서 심령을 가다듬기 위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한다. 생식으로 끼니를 잇고 나막신으로 가파른 마이산을 오르내리며 얇은 무명옷으로 삼동의 혹한을 배겨낸다.

 

입산 뒤 일년 만에 깊이 깨달은 바 있어 유도(儒道)의 윤리도덕과 불교의 명심견성(明心見性), 그리고 선도의 연심정기(鍊心正氣)를 근본으로 도를 닦았다.

만인의 속죄를 빌고 억조창생을 구원할 목적으로 돌탑을 쌓기 시작했다. 세속과는 완전히 등진 채 낮에는 돌을 나르고 밤에는 기도하며 탑을 쌓기 30여년. 그 긴 세월동안 그는 속세 중생의 죄를 대신하고 인간의 백팔 번뇌에서 해탈하기 위해 108기의 탑을쌓았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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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이 하나하나 완성될 동안 보통사람 같으면 고독을 못 이겨 세속에 내려오겠지만 그는한사람의 힘으로 움직였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큰 돌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돌탑을 완성했다.

108기의 돌탑들을 그냥 아무렇게나 쌓은 것이 아니라 탑의 축조와 형태, 배치에는 그의 사상이 담겨있다. 마이산의 돌탑들은 제각기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천지탑, 일광탑, 오방탑, 중앙탑, 월공탑, 신장탑 등으로 불린다.

 

 

이러한 탑들의 배치는 팔진도법을 이용한 것이다. 팔진도법은 제갈공명이 창안한 진법으로 가운데 중군을 두고 전후좌우 그리고 사우(四隅)에 여덟 진을 배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이산 돌탑의 각기 다른 탑형은 음양의 이치 즉 역학에서 만물을 이룬다는 상반되는 성질을 가진 두 가지의 기를 이용해 구성되었다. 높고 낮은 탑의 구조는 상생(相生)과 오행(五行)의 이치에 따라 결정되었다.

 

마이산 돌탑의 재료인 돌은 마이산에서 30여 리 안에 있는 산의 돌들을 주로 이용했으나 주요 탑들에 들어가는 커다란 돌들은 전국의 명산 각지를 순례할 때 그곳에서 기도를 한 후 망태기에 담아왔다고 전해진다.

 

명산으로부터 마이산까지의 먼 길을 그는 단숨에 왔다고 하는데 이 때 축지법을 썼다고 한다. 특히 이런 돌들을 가지고 탑을 쌓기 위해 그는 초저녁에는 기도를 하고 자시가 되어 아모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돌 하나씩만 쌓았다고 전한다.

 

한번은 주변 사람들이 그가 탑을 어떻게 쌓는지 몰래 구경하려고 탑사 구석에 숨어있었는데 자정이 다가오자 모두들 자기도 모르게 잠에 빠져버렸다고 전한다. 이것은 이갑룡 처사가 아무도 구경을 못하게 하기위해 신통력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깜박 자다가 눈을 떠보니 어느새 그 높은 돌탑 위에는 커다란 돌 하나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때 그가 올려놓은 그 장소에는 돌들 말고는 나무 구조물 등 아무 보조물이 없었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마이산 인근지역 주민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마이산 돌탑의 축조비법과 이갑룡 처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랜 옛날부터 전설(傳說)로 내려오는 암석설화(巖石說話)

- 공암(孔巖)

우리나라 조선의 태조(太祖)는 장차 도읍을 옮기고자 먼저 공주의 계룡산 남쪽 방면을 탐색하였다가 귀에 한양을 택했다.

<도선비기(道詵秘記)>에서 말하기를, 서쪽에 공암이 있다고 했다. 또 말하기를 석벽에 붉은 글씨로 ‘공암(孔巖)’이라고 써 있다고 했다. 그런즉 두 땅은 다 서쪽에 있는데 붉은 글씨의 공암을 찾아내야 도읍지가 결정될 터였다. 마침 그 붉은 글씨를 인왕골 석벽에서 찾아내었으나 자획이 마멸되어 여간해서는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드디어 이곳에 도읍을 세우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

(한(韓)? 필원잡기(筆苑雜記))

 

- 화암(花巖)

퇴계 선생이 살던(안동) 시냇물 남쪽에 화암이 있다. 거기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일컬어 화암대(花巖臺)라 이름 불렀다. 제자들은 화암 옆에 초가집을 지어놓고 거기서 학문을 닦았다. (한(韓)? 연보(年譜))

 

 

- 대왕암(大王巖)

이견대(利見臺) 아래의 해중(海中)에 돌이 사각으로 되어 우뚝 솟아나 있는데 이곳은 신라 문무왕을 장사 지낸 곳이다. 그래서 대왕암이라 부른다. 신라가 자주 왜인(倭人)의 침입을 입어서 문무왕(文武王: 신라의 30대 왕, 661~ 680)이 이를 괴로워한 나머지 **서 용으로 되어 나라를 지키고 적의 노략질을 막겠노라 맹세하였다.

 

그리고 죽으면 수중에 장사 지내 주기를 유명(遺命)으로 남겼다. 신문왕(神文王: 신라 31대 왕)이 유명을 좇아서 추모하여 커다란 용이 해중에 나타났던 곳에다가 능을 썼다. 마침내 이것을 이름 지어 말하기를 대왕암이라 했다. 12(한(韓)? 여지승람(與地勝覽))

 

경주군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 200미터 지점에 위치한 바위섬에 있는 해중릉이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 30대 문무왕의 수중능으로 둘레 200미터의 바위섬과 남북으로 십자 모양의 물길을 깎은 다음 가운데를 작은 못처럼 파서 항을 이루고 있다. 이 곳에 깊이 3미터, 폭 2.2미터, 두께 1.1미터의 큰 돌을 물속 깊이 놓아 그 밑에 유골을 모신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큰 돌을 대왕석이라 하며 사적 158호로 지정하였다.

 

 

- 우암(愚巖)

금양(衿陽: 경기도 시흥의 옛 이름)의 동쪽에 한 산이 있는데 산이 북으로 뻗치기를 걸어가는 범과 같다. 거기에 높은 바윗돌이 있으니 부르기를 범바위라 한다. 흔히 전하기를 그 고을 사람들이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바위 이름이 쓰여 왔다 한다. 윤자(尹慈)라는 사람이 그 고을 원님으로 와서 유유주(柳柳州)의 우계(愚溪)라는 시냇물의 ‘우(愚)’자를 따서 그 이름을 고치어 우암(愚巖)이라고 작설하여 이것을 해석했다. (한(韓)?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 마암(馬巖)

여강(驪江: 지금의 경기도 여주)에 마암(馬巖)이 있는데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누런 망아지가 물에서 나왔다 하여 그런 이름이 되었다 한다. 목은(牧隱: 이색)의 시에 읊기를,

“수해(水害)를 막아 주는 공이 드높은 마암석(馬巖石)이오, 커다란 용문산(龍門山)에서 하늘의 힘으로 이곳에 떠서 왔도다.” (한(韓)? 여지승람(與地勝覽))

 

- 처용암(處容巖)

개운포(開雲浦)의 바다 가운데에 한 바위가 있는데 대대로 전하기를 처용암(處容巖)이라 불리어 온다. 신라 헌강왕(憲康王: 49대 왕, 875~ 885)이 납시어 노닐 적에 개운포(울산 근처)에 이르니 한 이상한 사람이 기이한 형용에 괴이한 복색을 하고 노래와 춤으로 왕덕을 찬양하고 있었다. 그는 임금을 따라 입경하여 자기가 처용이라고 불렀다. 임금은 처용에게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게 하고 또한 벼슬을 내려 주었다. 달이 뜨는 밤마다 부르는 처용의 노래와 춤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한(韓)? 羅史)

 

 

- 낙화암(落花巖)

백제 의자왕(義慈王: 최후 임금 31대 왕, 641~ 660)이 당나라 병사에 패함에 궁녀들이 모두 흩어져서 이 바위에 올라 스스로 강물에 떨어져 죽었으므로 낙화암이라고 한다. (한(韓)? 여지승람(與地勝覽))

 

 

- 곡구암(谷口巖)

도산(陶山: 지금의 안동)의 18절경 중에서 첫째가 곡구암(谷口巖)이다. 퇴계 선생이 일찍이 서당 앞을 가시삽작으로 가리고 이를 ‘유정문(幽貞門)’이라 이름 붙였다. 문 밖의 작은 길은 개울을 따라 내려가서 동구에 이른다.

 

그 개울 양쪽 산이 서로 맞대어 있어 흡사 산문을 이룬 듯 하다. 이것을 곡구암이라 한다. 시를 지어 읊기를, “동으로는 강과 대(臺)를 디디고 북으로는 구름 속에 잠기는 듯 거치른 골짜기의 입구를 열어 산문을 방불케 하누나. 이 이름이 우연히도 지난날의 현인이 있던 곳과 비슷하여 임촌에 숨어 농사짓는 고상한 정취를 어찌 쉬이 논할 수 있으랴.”

 

(한(韓)?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 서석(瑞石)

무등산(無等山) 위에는 많은 돌들이 모여 있는데, 올려다보는 놈, 구부리고 있는 놈, 누워있는 놈, 서있는 놈 등 이런 것들이 번잡하게 이루어져 있다. 그런가하면 외따로 서있는 것도 있다. 높이가 수백 척은 되고 사면은 깎은 옥과 같아 이름하여 부르기를 서석이라 한다. 그 산 이름 또한 서석산(瑞石山)이라고 말한다.

(한(韓)? 여지승람(與地勝覽))

 


- 총석(叢石)

14통천군(通川郡) 북향으로 수십 개의 돌기둥이 해중에 주욱 모여 서 있는데 육면이 모두 깎아낸 옥과 같은 것이 네 군데에 있다. 정자는 바다 물가 언덕에 있어서 총석과 가까이 마주보므로 총석정이라고 이름 부른다. 대대로 전해오기를 신라 때의 사선(四仙)인 술즉(述卽) 등이 여기에 와서 노닐며 구경했다고 한다.


- 주천석(酒泉石)

영월군 주천면의 남쪽 길가에 돌이 있는데 형상이 돌로 된 말구유통과 같다. 즉 주천석(酒泉石)이다. 세상에 전해 내려오기를 이 돌로 된 말구유통이 예전엔 서천(逝川) 가에 있었는데 거기에 담겨진 것을 먹는 사람마다 흡족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고을 아전들은 그것이 왕래하는 길가에 놓여 있는 것을 꺼려하여 여럿이 함께 옮긴 것이다. 그리고 난데없이 굉장한 뇌성벽력이 돌을 세 조각으로 갈라놨다.

 


- 살수칠석(薩水七石)

수(隋)나라 양제(煬帝: 605~ 610)가 고구려를 쳐들어왔을 적에 수나라 군사가 살수 즉 지금의 청천강 위쪽에 진을 쳤었다. 강을 건너려 했지만 배가 없었다. 이때 홀연히 스님 일곱 명이 물가에 이르렀다. 스님 여섯 명이 바지를 걷고 건너는 것을 수나라 군사들이 바라보고서 물이 얕다고 하면서 다투어 건너다가 빠져죽었다. 그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다. 물이 그 때문에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 그 후에 이로 인하여 일곱 개의 돌을 나란히 놓고 스님 일곱을 상징하였다.

(한(韓)? 여지승람(與地勝覽))

 

 

- 경석(磬石)

우리나라 영조(英祖: 1725~ 1776)에 남양(수원)에서 경석을 얻었다. 석색(石色)이 푸르고 흰 것이 서로 뒤섞인 무늬 결이 있었다. 박우라는 사람을 명령하여 경쇠를 만들었다.

(한(韓)? 여지승람(與地勝覽))

 

 

- 제시석(題詩石)

가야산 동구에 무능교(武陵橋)가 있는데 수십 리에 걸쳐 불그레한 낭떠러지가 뻗어있고 푸른 재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검푸릇푸릇 우거졌다. 바람과 물은 서로 소용돌이 쳐서 저절로 쇳소리가 울린다.

 

최고운(崔孤雲)은 일찍이 한 구절의 시를 지어 돌 위에 새기기를, “물살은 미친 듯이 뿜어서 쌓인 돌에 부닥치어 첩첩 솟는 산봉우리를 울게 하여 사람의 말소리를 지척 간에서도 알아듣지 못할지니, 항상 이 세상의 옳으니 그르니 떠드는 소리가 귀에 들어올까 두려워 짐짓 흐르는 물을 시켜서 산을 다 귀먹게 하였구나.”

취한 듯이 흘려 쓴 시가 뚝 뛰어나 운치가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 시가 새겨진 돌을 가리켜 최공의 제시석(題詩石)이라 한다.

(한(韓)? 파한집(破閑集))

 

 

- 망부석(望夫石)

정읍에서 북으로 십리 떨어진 곳에 있다. 그 고을의 한 사람이 행상으로 나가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의 처는 산으로 올라가 한 돌 위에서 남편을 기다리며 멀리 바라보았다. 그녀의 남편이 밤길을 걸어가다가 해로운 일을 당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진흙물의 더러운 것을 비유하여 노래지었다. 그 곡을 이름 불러서 <정읍사(井邑詞)>라고 한다. 대대로 전하여지기를 재에 올라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돌이 되었다고 한다. 그 자취는 아직 뚜렷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전래석인 이형상(李衡祥) 공(公)의 전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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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상 공이 연천에 은거하는 동안 경주 바닷가의 산록 단층 가운데에서 진귀한 화석을 가져오게 하여 조화무궁(造化無窮)이라 제하며 아꼈던 돌이다. 근래에도 이런 굴껍질 화석이 포항 경주에서 발경된 바가 있다.

 

전래석은 본래 명인의 손을 거쳐야 한다는 것과 그것을 뒷받침할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유서(由緖)있는 내력이 확실하게 기록되어 내려옴으로써 전래석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전래석은 분명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명인에 의하여 아껴져왔던 자취가 확실한 것으로써 우리 애석계(愛石界)에 길이 남을 훌륭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 수석은 이조 삼대(三代)인 태종(太宗) 제 10대손인 이형상(李衡祥)이 즐겨 누려왔던 것인데, 현재 소장자인 이공재(李公宰)씨는 이형상(李衡祥)의 9대손이다.

 

이형상(李衡祥)(1653~1733)은 호조참의(현재의 차관급)의 직위까지 올랐던 박학다식하고 청렴결백한 실학파 선비였다.

 

이형상(李衡祥)이 생존시 일기체 형식으로 직접 기록한 <언행록(言行錄)>1)을 볼 것 같으면, 자신이 1690년대에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있을 때 다섯 개의 괴석(怪石)을 소장하게 되었다고 씌어있다. 하지만 지금은 두 개만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두 개의 괴석 중에서 그 하나는 전복껍질의 형상인데 퇴적층에서 발굴된 화석이다.

이형상(李衡祥)은 1690년대 무렵 사람을 시켜 그 신기한 화석을 가져오게 하였다 한다. <언행록(言行錄)>에는 당시 아꼈던 그 화석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조화무궁(造化無窮)’이라 제목을 붙이고,

“경주(慶州)의 한 산록 단층 가운데는 오래된 소라와 조개껍질이 퇴적되어 있었는데, 사람을 시켜 가져오게 하였다. 조개 형상이요, 속은 돌인 듯, 혹은 위쪽은 소라이며, 아래쪽은 용암의 액체로 된 것 같은데, 먼 옛날 물리적 변화의 흔적이 있도다. 항상 가까이 두고 그 조화무궁(造化無窮)한 흔적을 바라보며 감상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두 번째의 전래석이다. 그것은 상당한 연구가치가 있는 수석의 전통을 보여주는 것이다. 높이가 16cm이며 길이와 폭이 10cm 정도의 자그마한 돌이다. 다시 <언행록(言行錄)>에서 이 돌에 관한 기록을 보면, 글머리에 ‘천봉만학(千峰萬壑)’(수많은 산봉우리와 산골짜기)이라 제목을 붙이고 설명하기를,


“책상위에 작은 괴석 하나를 두고 감상한다. 골짜기 돌 틈에 노송(老松)의 씨를 키우고 푸른 이끼를 덮어 계곡을 이루었다. 항상 이르기를, 책상에서 학문에 열중하다가 잠시 눈을 돌려보면 한가로이 산수의 아름다운 정취를 만끽하게 되노라.”


16전통적인 산수(山水)석(石)의 영상을 잘 말해주고 있다. 깊은 산골짜기 틈에는 으레 운치 있는 노송이 있기 마련이니, 이러한 경치를 상상으로 감상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한 손바닥위에 놓여지는 이 작은 전래석임에 그 작은 골짜기 틈에 어떻게 노송을 심었겠는가? 그래서 노송의 씨나마 심고서 짐짓 장중한 노송의 자태가 눈에 보이는 듯한 감상에 젖었으리라.

 

이러한 상상의 감상이 산수석을 즐기는 요체인 것이다. 푸른 이끼를 덮었다 함은 오늘날 말하고 있는 양석(養石)의 일단락이다.

보드라운 이끼를 돌에 입혀 푸르른 산악의 모습을 실제로 바라보는 감회에 젖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돌에 이끼를 입혀 양석(養石)하는 것인데 이러한 이끼의 양석(養石)이 옛날에도 이루어졌다는 근거가 이 전래석의 기록에 잘 나타나있다. 현재 발견된 전래석 중 최고(最古)의 전래석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연구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보인다.

 

이형상(李衡祥)이 경주부윤으로 있을 당시인 1690년대에 이 전래석을 본래 소장하고 있던 기록을 볼 때, 적어도 290년 전 것이 된다. 궁중정석(宮中庭石)의 형식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것을 상고하면 그 전부터 소장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원(秘苑)의 정석(庭石)과 그 형식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점을 고찰할 때 옛날 궁중(宮中)의 괴석 사랑이 얼마나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현재 비원 안에 보존되고 있는 정석(庭石)이 얼마나 오랜 역사를 지녔는가도 짐작할 수 있다.

 

이형상(李衡祥)은 호조참의 벼슬을 자진사양한 후 경북 영천에 은거하였다. 현재의 영천읍 내 금호강 둑에 자리 잡고 있는 호연정(浩然亭)에 성남서원을 차리고 후진양성에 힘을 쏟으며 말년을 장식했다. 이 호연정(浩然亭)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형상(李衡祥)의 수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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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상(李衡祥)의 초상화(자화상이라고 한다.)


1) 현재 정신문화원에 보관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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