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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편 中國古典壽石에 맺어진 먼 발자취를 따라

高山 | 2009.08.12 14:54 | 공감 0 | 비공감 0

 

             차              례

- 미불(米?)의 보보제(寶普薺) 연산석(硏山石)

- 유명한 미불(米?)의 배석(拜石)

- 소동파(蘇東坡)가 애석(愛石)하던 괴석공(怪石供) 이야기

- 백낙천(白樂天)의 太湖石과 축경(縮景)세계

- 성주석(醒酒石)과 이덕유(李德裕)의 평천장(平泉莊)

- 古典에 기록된 옛 석보(石譜)들

1

미불(米?)의 보보제(寶普薺) 연산석(硏山石)

강남(江南)이 망하고 나서 연산(硏山)이 흘러나와 선비의 집에 가 있다가 미(米) 노인의 소유가 되었다. 그 뒤에 미(米) 노인은 단양(丹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장차 집 지을 곳을 마련하려했는데 오랫동안 구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소중용(蘇仲容)은 소학사(蘇學士)의 동생이용 재옹(才翁)의 손자이다. 일을 벌여서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감로사(甘露寺) 아래쪽에 강을 끼고 있는 한 땅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엔 여러 종류의 나무가 빽빽했다.

이 곳은 대개 진(晋)나라, 당(唐)나라 사람이 살던 곳이다. 이때에 미(米)노인은 그 땅을 얻으려고 욕심을 냈고 소중용(蘇仲容)은 연산(硏山)을 얻고자 넘겨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시랑(侍郞)이란 벼슬로 있는 왕언소(王彦昭) 형제가 함께 북녘에 올라가서 진실로 화해토록 한 결과 마침내 소(蘇)씨의 땅과 미(米)노인의 연산(硏山)을 서로 바꾸었다.

이래서 연산(硏山)은 소(蘇)씨가 소장하게 된 것이다. 몇 개월이 안 되어 나라에서 그것을 찾기 시작했다. 미원장(米元章)과 소중용(蘇仲容)은 모두 이에 대하여 지은 시(詩)가 있다. 소중용(蘇仲容)이 전에 시를 지어 읊기를


연산(硏山)은 쉬이 볼 수 없는 돌이다. 옮겨다 놓고 보니 작은 푸른 봉우리를 얻은 셈이다. 윤택한 빛은 책상위에 향기를 베어들게 하고 연기가 자욱하게 잠겨 있을 듯 하다. 깎아지른 듯이 우뚝 솟은 산모양은 스스로 고색(古色)을 품은 채 외로이 서서 높고 울창하고 가파르니 어찌 구름과 노을이 없을 것인가. 이 조화로움은 하늘에 통하여 있다.

서있는 절벽에 봄빛이 화창한 들이 비치고 천 길 되는 소나무들이 의당 있을 법 하다. 언틀먼틀 가파른 것은 작은 물결 큰 물결처럼 떠있고 우러러 고개를 들어보면 엎드린 교용(蛟龍)이다. 아주 쓸쓸한 기운은 바람이 일고 비를 내리게 한다.

공손한 자태는 산림 가운데 있는 것 같고 티끌 세상의 꿈은 홀연히 도달하지 못하매 이에 부딪치는 눈길에는 만 가지 근심이 텅 비어버린다. 공(公)(미불(米?))의 집에는 기이한 돌이 많은데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함께 구경하기를 허락지 않았다.

 

연산(硏山)은 층층으로 푸른 기운을 뿜고 우뚝 솟은 봉우리는 실로 하늘에서 만든 것이다. 물기를 축이며 스며드는 산 위의 샘은 물방울을 떨구어 붓끝을 돕는다.

 

이 붓을 휘두르니 세상을 놀라게 하는 글을 짓게 하고 시를 읊고자 뜻을 세워 붓을 들면 붓끝은 연산(硏山) 아래쪽에 있는 벼룻물을 만나게 한다. 강남(江南)에는 가을빛이 일고 바람은 먼 동정(洞庭)에서 너그럽게 불어올 때 이따금 아름다운 경치에 파묻혀 붓을 휘두르니 깜짝 놀랄 절묘한 말이 나온다.

 

공(公)에게 이 보배로운 돌을 원하여 얻으니 모든 다른 물건과는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없다. 하필이면 숭산(嵩山)을 아끼겠는가? 이것을 소장하고 있으니 지상의 신선이 된 것 같다.

근자에 미불(米?) 또한 시를 지었다.

연산(硏山)을 다시 볼 수 없으니 시를 읊는데 헛된 탄식뿐이다. 오직 갖고 있는 ‘두꺼비돌’만이 나를 향하여 눈물을 뚝 뚝 흘릴 뿐이다.

이 돌이 그 사람에게 한 번 들어간 후에는 내 손안에서 두 번 다시 볼 수가 없구나. 항상 친구들과 함께 가서 그것을 보자고만 하여도 꺼내 보이지 않으니 소공(蘇公)은 정말 인색한 사람이다. 내가 지금 붓을 들어서 상상하며 그 돌 그림을 그리니 그럴듯하게 비슷한 모습이 눈앞에 나타난다. 이제부터는 마땅히 우리집의 뛰어난 기운이 다시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 숭녕 원년(嵩寧 元年)(1102) 8월 열 엿새 날 양양(襄陽) 미불(米?)이 이것을 쓰다-.

또, 장백우(張伯雨)가 미 원장(米 元章)의 연산도(硯山圖)를 보고 제(題)하여 글을 지었다.

남궁(南宮) 미(米) 노인(老人)은 글로써 상대되는 적수가 없는데 일찍이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자고 맹세한 설하동이란 친구가 있었다. 연산(硏山)은 예부터 고요히 구경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돌 친구(연산(硏山))는 사람으로 하여금 돌 아래에서 절하게 하는 풍속을 남겼다.

조상을 제사지내는 제단처럼 생긴 화개봉(華蓋峰)의 천단(天壇)이라 할 수 있는 곳에는 정결한 이슬을 모았다. <월암(月岩)>의 텅 빈 굴은 하늘에 통하여 내다보였다. 영리함을 초월하여 옛 학문을 배운 귀성(龜城) 노인은 돌의 품수에 따라 일일이 시를 지어 이름붙인 것이 훌륭했다. 또 배석도(拜石圖)에 제(題)하여 읊은 시에는


청렴하게 미쳤던 해악(海岳)(미불(米?)) 노인은 세상의 영화와 권세를 탐탁히 논하였겠는가? 영리함을 물리치고 천진한 어린아이와 소탈한 나무꾼처럼 돌 앞에 절을 하면서도 결벽한 공(公)은 울긋불긋 단청한 재상(宰相)의 문 앞에는 가지 않았다.


미(米) 남궁(南宮)이 가졌던 연산(硏山)은 봉우리에 자리 잡은 구렁이 무릇 여덟 군데인데 공손히 푸르르게 솟은 봉우리를 그림 그리고 있을 적에 이에 제(題)하여 시를 읊었다. 2


<화개봉(華蓋峰)>

옥(玉)으로 만든 추(錘)를 보개산(寶蓋山)에 달아놓으니 맑은 기운이 하늘 문을 열었다. 비와 이슬은 그 아래에 있으니 어찌 초목이 번성하는데 거리낌이 있겠는가?

 

<월암(月岩)>

미끈한 바위가 둥근 달빛을 가렸으니 만년의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곧바로 단정(端正)히 바라보면 비로소 산하(山河)를 보는 기분이다.

 

<옥순(玉筍)>

죽순처럼 솟은 봉우리는 깎은 옥과 같아서 가히 군자가 은거할 수풀속이라 할 수 있다. 죽순 같은 봉우리에 아마도 해가 기울면 허심(虛心)한 자가 아니고서는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용담(龍潭)>

만 길이나 되는 넓은 하늘이 맑았고, 깊고 맑은 물이 하늘의 경치를 끌어 모아 위에 비치게 한다. 만약 볼만한 것이 있다고 하면 이것을 보는 사람 스스로가 그윽하고 험준한 경치를 깨닫는데 있다.


<취만(翠巒)>

머리를 들어 우뚝하게 솟은 것을 보자니 그 높이가 지극히 높고 가파르다. 푸르른 빛이 항상 사람들을 비추어주므로 반드시 그 밑바닥엔 신선한 물이 있음을 알겠다.


<상동(上洞)>

구름과 비를 부르기도 하고 흩어버리기도 하는데 원숭이들은 붙들어 맨줄을 끊으려하므로 어찌 도망치는 형용을 가진 놈은 없겠는가? 이들은 조그마한 별천지를 오락가락한다.


<하동(下洞)>

입술이 쳐진 듯한 모양은 모과(木瓜)라는 식물의 느슨한 잎사귀와 같고 또 오무려 있는 곳은 주둥이와 같다. 호랑이와 표범은 한 곳에만 쳐박혀 있지 않고 바람과 우뢰는 때때로 짐승의 울음처럼 꾸르렁거린다.

<방단(方壇)>

문득 방단(方壇)에서 하늘 위의 세계를 바라보면 하늘로 오르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험하여 길이 없을까 의심을 품는다. 흰 학(鶴)은 다시금 돌아오지 않고 하늘높은 가을은 바람과 이슬을 위하여 활짝 열어 놓은 듯하다.

- 미양양지림(米襄陽志林)에서...

 

유명한 미불(米?)의 배석(拜石)


3

미불(米?)1)은 무위군석(無爲軍石)을 알고 있던 사람으로 관아에 서 있는 돌이 매우 기이한 것을 보고는 도포와 홀(笏)을 가져오라 명하고 나서, 돌 앞에 절하면서 부르기를 석장(石丈) 즉 ‘돌 어르신네여’ 하였다.

망질을 하는 사람들이 이를 듣고 논란하게 되었고 그 말이 조정에까지 전하여져 웃음거리가 되었다. 어떤 사람이 미불에게 묻기를 정말 그것이 사실이요 했더니 미불은 한가로이 대답했다.

내가 어째서 절을 하였겠소. 그것은 읍을 했을 뿐인 것이오.”

하경명(何景明)은 미(米) 원장(元章)의 배석도(拜石圖)에 제(題)하여 이렇게 말했다.

 

“절개는 바위와 바위에 비교하고 뜻도 굳은 것에 비하였다. 관을 쓰고 도포를 입고서 괴석 아래에서 절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어여쁜 일이다. 이 뜻을 세상사람 어느 누가 알아차릴 것인가. 지금 사람들은 공연히 미불의 미쳤던 것을 부러워한다.”

미불이 감강(監江)의 태수로 있을 때에 괴석이 하연(河?) 땅에 있다는 소리를 들은 바 있었지만 그곳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그 괴석을 괴이한 것으로 여기고 있어서 감히 가져가기를 못했다. 미불이 명하여 자기 고을에 옮겨다 놓으라 하였다. 돌이 도착하자 공(미불)은 놀래어 급히 자리를 깔아 놓기를 명한 후 뜰아래에서 돌을 향해 절을 하며 말했다.

“내가 石兄을 보고 싶어 한 것이 스무 해나 되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저 사람은 아마 태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쑥덕거렸다.

자지(紫芝)라는 사람이 감강(監江)에 나들이를 가보니 돌은 아직도 감강에 있었다. 그 지방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 일은 사실이었다. 시를 지어 일컫기를,


이 세상을 살면서 겪은 고생이란 우연한 것은 아니다. 남보다 고상한 공과 같은 이가 세상에 어찌 있겠는가. 평생을 글과 글씨를 배움에 붓끝이 예리했고 만년(晩年)에는 자그마한 고을의 원님이 되었다. 하늘이 공에게 부여하기를 준서(准西)의 장강(長江) 머리에 있는 도원(道院)에서 높은 베개를 베고 단잠 자라고 그리한 것이다.

 

사군(使君)이 문을 닫고서 기이할 정도로 훌륭한 글씨를 쓰고 문전의 흰 물결을 봄바람에 출렁인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이채로운 졸은 하늘이 내보낸 것이라 했다. 서른여섯 개의 봉우리가 주빗주빗한 돌의 모양은 산에 싸이고 내에 둘러싸인 경치 좋은 별천지와 같다. 불현듯 나의 형님이라 부르며 두 번 절하니 속된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매우 괴이하다고 놀랄 것이다.

금전(金錢)을 좇아서 형을 삼는 것은 참으로 가련한 자이고, 돌을 향하여 절하며 형이라 부른 것은 차라리 덕행이 있는 일이다. 벗이 떠난 후 보이지 않는 곳을 바라보고 가벼이 절하는 것은 정말 우스운 노릇이오, 미공(米公)이 돌에게 절한 것과는 일치되는 류가 아니다.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와의 거리는 이처럼 격차가 있다.

이 차이는 어찌 인간세상의 수만리 떨어진 거리일 뿐이랴. 사실 옳고 그름에 대하여 예부터 공평한 의론이란 없는 것이므로 피차간에 서로 웃는 일이 어느 때에 끝날 것인가? 우뚝이 솟은 듯한 품격은 처음 손(客)을 대하여 말이 없은즉 요(堯) 임금이나 걸(桀) 임금에 대한 분분한 의논 따위도 되는대로 두고 볼 수밖에 없다.


소동파(蘇東坡)가 애석(愛石)하던 괴석공(怪石供) 이야기

4

서경(書經)의 우공편(禹貢篇)(우(禹) 임금은 서기전 약 2200년 중국 하(夏)나라의 첫 임금)에 청주(靑州)땅의 연송(鉛松)괴석(怪石)에 대하여 나오는데 그것을 풀이하는 사람은 ‘괴석(怪石)은 돌이면서 옥(玉)과 같다.’하였다.

오늘날 제안(濟安)땅 강 위쪽에서 이따금 미석(美石)을 얻는데 옥과 함께 놓으면 분간할 수가 없다. 불그레하고 노랗고 흰색이 많고, 그 무늬가 둥글게 돌아가는 소라껍질처럼 사람의 지문과 비슷하여 정밀하고 분명한 것이 사랑할만하다.

비록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그림 그리려고 뜻을 갖는다면 그 실물에 미치지 못한다. 어찌 옛 사람들이 그런 것을 괴석(怪石)이라 했는가? 무릇 물건의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바탕(質)과 형상(體)에서 나오는 것인데 과연 나는 그것이 어디에서 생긴 것인지 알지 못한다.

세상의 돌로 하여금 모두 이와 같은 것이라면 지금의 돌은 모두 괴석(怪石)이 될 수 있다. 해외에서는 형용으로써 말을 하는 나라가 있다. 입으로는 말을 못하면서 피차간에 형용으로 뜻을 통하니 그 형용을 내는 것이 입보다 빠르다고 한다면 그것을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모든 것을 꾸미는 하늘의 조화가 움직여서 홀연히 없던 것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사람은 참으로 교묘한 것이다. 비록 우(禹)임금 이래로 지금까지 괴이한 일로 되어있다.

5

제안(濟安)땅 어린아이들이 강에서 목용을 할 때에 얻은 돌들이 있는데 재미삼아 밀가루 떡과 바꾸어 보았다. 이처럼 오래 했더니 298개를 얻었다. 굵은 놈은 지름이 한 치 정도요, 작은 놈은 대추, 밤, 마름 등과 같았다.

 

그것들은 한결같이 호랑이와 표범의 머리와 같고 어떤 것은 눈, 코, 입을 다 갖춘 것이 있다.

이것들은 뭇 돌중에서 가장 나은 것이오, 또 옛 동분(銅盆)을 하나 얻어다 거기에 돌을 담고 물을 뿌려주니 찬연한 빛이 났다.

 

그리하여 예산의 귀종불인(歸宗弗印)이라는 선사(禪師)가 보낸 심부름꾼이 마침 왔기에 그것을 선물로 바치게 되었다.

 

선사(禪師)는 일찍이 도통(道通)한 눈으로 세상의 모든 섞이고 덩어리진 만물과 빈 구렁들을 보아왔는데 하나도 똑똑히 알지 못했다. 밤에 빛이 번뜩이는 커다란 구슬에서부터 기왓장 깨진 것까지도 그렇거든 하물며 이 돌에서랴. 이 돌을 비록 원하는바에 따라 바쳐지게는 되었는데 더러운 물을 그 돌에 갖다 부으니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까지의 이전에는 산중의 스님이나 시골 사람들이 선사(禪師)에게 무엇을 바치려고 했으나 의복과 음식과 침구를 변통해 낼 힘이 부족하였으며 맑은 물 속에 있던 돌이나마 얻어서 선사에게 바친 것은 대체로 동파(東坡)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호중구화(壺中九華)와 구지석(九池石)

호구(湖口)사람 이정신(李正臣)이 아홉 개의 산봉우리를 이룬 기이(奇異)한 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창(窓)가의 난간 비슷한 것이 가늘게 둘려져 있었다. 내가 백 냥을 주고 그걸 매입하여 구지석(九地石)과 함께 짝을 지으려고 하였는데 때마침 남쪽으로 가는 도중이라 겨를이 없었다. 나는 그 돌에 이름을 붙여 호중구화(壺中九華)라 하고 또 시로 기록했다.


맑은 시내에 번개가 번뜩이매 구름봉우리 사라지고 오히려 푸르른 빛깔이 하늘을 쓸어내는 듯함에 꿈속에서도 놀란다.

다섯 재(嶺)에 숱한 멧부리가 줄러 있음을 근심치 마라. 구화산(九華山)이 지금 이 별천지(壺中)에 있으니.

천지에 물이 떨어져 층층이 나타나고 옥녀(玉女)의 창(窓)이 밝아 곳곳에 통한다. 나를 생각하는 구지석(九地石)이 너무 외롭게 홀로 있어서 백 냥으로 푸르고 영롱(玲瓏)한 것을 사가지고 돌아가리.


내가 지난날에 <호중구화(壺中九華)> 시(詩)를 읊었고 그 뒤 팔년이 지나서 다시 호구(湖口)땅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돌은 이미 호사자(好事者)들이 가져가버렸으니 전에 지었던 시운(詩韻)을 이어서 스스로 품은 마음을 풀어본다.


강변에 말을 매어놓고 천봉(天峯)을 달려가 찾아 물으니 이주 땅 북녘하늘 아래로 갔음을 알았다. 그 좋은 물건은 이미 멀리 가버려 맑았던 꿈이 깨어졌으나 그 참된 형상이 오히려 그림 가운데 있는 듯 하다.

노년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올 제에 운량(云亮)이 동행하긴 하지만 희망을 쓸어버리니 누구와 짝을 지어 공경함이 통할꼬.

다행이 그 돌을 꾸며 받쳤던 동분(銅盆)이 있으니 그것을 가져가면 구지석(九地石)의 옥색(玉色)이 스스로 총롱(?瓏)하리라.

6소동파는 색채 아름답게 온갖 무늬가 영롱한 작은 돌 298개를 구했다. 크기는 큰 것의 지름이 한 치 정도이고 작은 것은 대추나 밤알만한 것이었다. 이러한 행적이 귀감이 되어 후대인들도 작은 돌멩이의 운치를 소중히 여겼다. 위의 돌 그림은 명의 유명한 애석가이며 「소원석보(素園石譜)」의 저자인 임유린의 소장석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구지석(九池石)은 세상에 드문 보배이다. 왕진경(王晋卿)이 돌을 빌려 보자는 짧은 시를 써서 보내왔는데 그 뜻을 보면 빼앗아 갖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감히 아니 빌려줄 도리 없으므로 이 시를 지어 먼저 보낸다.


“바다 돌이 주궁(珠宮)에 오니 뛰어난 색깔은 미인의 눈썹처럼 푸르다. 언덕과 비탈은 한 자 남짓한 사이에서 자그마하게 둘러 있는 능과 봉우리로 충분하다. 어여쁨은 이화정(二華頂) 꼭대기까지 연했고 빈 구렁에는 띠(茅)가 서너 포기 났다. 처음에는 드높은 구지석(九池石)이 化해서 된 것인가 의심했고, 또 신선이 사는 영주산이 낯을 찡그리며 덜 좋아할까 두려워했다.

 

다정한 진경이 교남사로 되어와서 이 양주목사에게 진지를 올려 잘 대접을 했겠다. 이것을 처음 얻고 나서 하도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했고, 너 돌과 함께 사귀는 것은 더럽지가 않은 것이다. 고려에서 가져온 분(盆)에 담아 받쳐주고, 문등옥(文登玉)이라 이름을 붙여주어 대접을 했다. 그윽한 빛은 새벽의 여명을 앞지르고 서늘한 기운은 삼복더위를 물리친다.

 

이 늙은이(동파)가 사는 것은 어디에 붙여서 사는 것과 같고, 초가집도 오랫동안 마련하지 못했다. 한 지아비가 다행히 이 돌을 나르게 되어서 천리 길에서도 언제나 함께 왔다. 풍류로 사는 귀공자로서 무당(武當)이라는 골짜기로 귀양 가 은거했겠다. 거기서 산을 보기는 이미 싫도록 보았을 터인데 무슨 일로 내가 좋아하고 있는 돌을 빼어가지려 하는가. 가엽게도 오랫동안 몸져 눕게 하고자 하거든 차라리 주곡(奏曲)을 저바릴 것을 허락한다.

 

돌 주던 사람이 이르기를 남에게 빌려주지 말라고 하였으니 대대로 전하여 보고 섬기기 위하여 허락지 않을 것이매 사이 길로 돌아옴을 다시 한층 더 빨리한다.”


왕진경이 해석을 빼앗고자 보낸 시를 전목부(錢穆父), 왕중지(王仲至), 장영숙(蔣穎叔)에게 내보였다. 목부와 중지 두 사람은 허락하지 말라 하였고 영숙 혼자만은 그렇지 않다 하였는데, 오늘 영숙이 찾아와서 친히 이 돌의 묘한 모양을 살피고 드디어 전번에 한 말을 후회하였다. 그런데 동파(東坡)가 진경과 어찌 끝내 절교를 해서야 되겠는가? 만일에 한간(韓幹:唐대 화가)의 그림인 <이산마(二散馬)>와 능히 바꿀 수 있다면 다 허락할 작정이다. 다시 전운을 이어 시를 지었다.


“바라보면 거기엔 고향이 있는 것 같은데, 아주 넓어 까마득한 것이 바로 이 눈썹 밑에 가까이 있다. 분명치 않으나 아득한 속에 눈썹의 초록빛 같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비록 천리 먼 곳에 고향이 있으나 고향이 있는 듯한 이 돌에 한번 웃음을 붙이는 것으로 족하다.

 

평생을 문장으로 지내오면서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은 마음인데도 어려서는 망아지풀과 비름풀로 배를 채웠다. 그대의 뜻에 좇으면 집안이 텅텅 비어버리니, 두 봉우리가 찡그리는 것을 감히 보내지 못한다. 나는 오늘날에 하물며 쇠잔한 병쟁이인 셈이오, 그래 돌이나 바라보면서 땔나무를 하며 짐승을 기르는 아이가 의리로 갖다준 것을 잊지 못한다.

 

장차 구지석이 그리로 갈 것 같으면 민산(岷山)에서 나온 것일랑 나에게 가지고 있으라고 그 뜻을 거슬러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이 돌을 보살피고 있던 사람이 그 보배로움에 탐을 내지 않고, 티끌 없는 옥돌을 나에게 보전하게 하였다. 옛 사람이 시를 지어 서로 경계한 것에서 그 묘미 있는 말에 나는 감복했다.

 

영숙이 혼자서 다른 의견을 내세웠지만 세 사람의 의견 중에서 두 사람의 의견을 좇아 마음을 정했다. 그대의 집에 있는 가히 헤아릴만한 그림에서는 하늘을 나는 천리마가 어지럽게 이리저리 쫓는다. 바람처럼 날리는 말갈기는 이 들판을 휙 차갈 듯 하고, 번개 같은 꼬리는 시내와 골짜기를 흔든다.

 

그대가 구지석(九池石)과 이산마(二散馬) 그림과 서로 바꿀 것을 허락한다면 이 또한 내가 그러고 싶은 바이다. 오늘 아침 안서의 태수가 와서 양관곡(陽關曲)을 들려주면서 그리고 나에게 권하기를 이 산봉우리를 그냥 놔두라고 하니, 다른 날에 오기는 속하지 않다.”


식(軾:동파)이 돌과 그림을 바꾸고자 했더니 진경은 난색을 표했다. 목부는 그 두 개를 겸해서 가지고자 했다. 영숙은 그림을 불에 태워버리고 돌을 깨 부시자고 했다. 이에 다시 전운을 이어서 아울러 세 사람의 뜻을 푼다.

“봄철의 얼음은 참으로 여문 것이 없고, 서리 맞은 잎사귀는 옛 푸르른 제 빛깔을 잃는다. 조그마한 종달새는 봉새가 하루에 만 리를 날아가는 것을 의심하고, 도마뱀은 용과 같으며 한쪽 발로 다니는 기라는 짐승의 외발을 웃는다. 두 호걸이 다투어 소매를 잡아당기는데 선생 한 사람은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쥔다.

 

명경(明鏡)은 이미 대(臺)가 없어졌으나 맑은 병이야 어찌 찌푸릴 것이 있는가. 분(盆)안에 든 산은 감추어 둘 수가 없고, 그림 속의 말은 내놔서 먹일 도리가 없다.

애오라지 장차에는 마당가 처마 기슭에 내놨으면 놨지 하필 더러운 개울에다 버릴 수 있는가. 보배로운 것을 불태우자고 한 것은 진실로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어진 공자(公子)들이 말을 하매 이 육십 노인이 굴복을 한다. 이 묘한 돌의 모양을 옮겨 놓아다가 보고 싶어 하므로 짐짓 말을 구하려고 마음먹었다.

 

오직 어루만지던 것을 이미 다시금 내놓으려니, 하늘의 선녀들이 서로 달려와 돌려보내라 한다. 한없이 밝히는 등불을 주노니 이 그윽한 골짜기를 오랫동안 비쳐라. 이제 무엇이든 하나도 없다는 빈 마음을 정한 즉, 이 참다운 즐거움(법열(法悅))은 세속의 온갖 욕심보다 더 나은 것이다.

 

세 봉우리가 높이 솟은 것은 내가 나서 자라난 고향의 마을이오, 만 마리 말들은 그대가 사사로이 둔 낮은 사병(私兵)이다. 누운 구름이 흘러가다 돌아와서 이 돌에 머물러 쉬고, 그대의 말은 도적을 무찌르는 데는 신기하리만큼 썩 빠르다.”

 


소동파(蘇東坡)와 미불(米?)의 축경미(縮景美) 예찬

북송(北宋)대(960~1130)에 유명한 애석가인 소동파(蘇東坡)와 미불(米?)은 지금도 많은 수석인들의 흠모를 받고 있으며, 특히 소동파가 호국(湖國) 이정신(李正臣)의 집에서 아홉 개의 주빗주빗한 봉(峯)이 있는 구지석(九池石)의 명석을 감상하며 읊은 시는 지금도 많은 애석인들이 애송하고 있다.


7

 

                         소동파가 사랑했던 ‘소유동천석(小有洞天石)’


“푸르고 맑은 냇가에 번개가 번쩍하니 구름에 뜬 봉우리 사라지고 오히려 비취색의 푸른 빛깔이 하늘을 쓸어내는 듯 하여 꿈속에서도 놀란다.

다섯 재(嶺)에 수천의 묏부리가 둘러쳐 있음을 행여 근심치 마라. 구화산이 지금 이 별천지에 있으니

천지에 물이 떨어져 층층이 드러나고 옥녀(玉女)의 창(窓)이 밝아 곳곳에 통한다.

나를 생각하는 구지석이 너무 외롭게 홀로 있어서 백금으로 푸르고 영롱한 것을 사가지고 집에 가리라.”


소동파(蘇東坡)는 그 당시에도 놀라우리만큼 축경의 세계를 간직하고 음미하였음이 위의 시에서도 보인다. 그리고 소동파는 구름모양의 ‘소유동천석(小有洞天石)’이라는 명석을 즐겨 애완하였다고 한다.

동파는 미석에도 관심이 많았다. 양자강으로부터 채석되는 미석을 두개의 분에 넣어 그 50개를 선승(禪僧)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의 승려(僧侶)들도 애석취미가 성행되어 그 양상을 규지할 수가 있다. 또한 그는 수백 개에 달하는 미석을 모아 고분동반(古盆銅盤)에 넣어 정수하여 괴석공(怪石供)이라 이름 하여 애석한 그의 애석취미는 매우 다양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또 같은 송(宋)대의 유명한 서화가(書畵家)로서 한때 석광(石狂)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돌을 애완하고 아끼던 미불(米?)은 연산석(硏山石)이라는 한 자 정도 길이의 돌을 애석하고 있었다.

이 돌은 산봉우리가 서른여섯개로서 크고 낮은 봉우리가 우뚝 솟았고 많은 골짜기마다 깊은 구렁과 연못이 파였고 동혈(同穴)도 뚫린 천하의 명석이었다.

 

미불이 이 연산석을 관상하면서 시를 읊기를, ‘차분히 바라보면 비로소 산수를 알게 되는 기분이다.’ 라고 하면서 가운데 우뚝 솟은 주봉(主峰)을 보며 ‘비와 이슬이 저 높은 봉우리 밑에 있으니 어찌 초목이 우거지는데 어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손가락 크기로 돋아난 작은 봉우리를 가리키며


“머리를 치켜들어 우뚝 솟은 것을 보아하니 그 높이가 지극히 높은 것같고 또 가파르며 그 밑바닥엔 반드시 신선한 물이 고여 있음을 알겠다.”

고 하였으며 돌 한쪽 기슭에 푹 패여 물이 고이는 담(潭)을 가리키며 읊기를,

“만 리나 넓은 하늘이 밝고 깊고 맑은 물이 하늘의 천경(天景)을 끌어모아 물 위에 비쳐준다. 이것을 감상코자 한다면 그 오묘하고 준엄한 경개를 깨닫는데 있다.”


8

위와 같은 내용으로 산수의 축경미를 자상하고 알기 쉽게 시문으로 엮어 읊었던 것이다.

백낙천(白樂天)의 太湖石과 축경(縮景)세계

옛날 사물에 널리 통한 사람들(達人)은 모두 즐기고 좋아하는 것들을 저마다 가지고 있었다. 원안(元晏)선생은 서예를 좋아했고 정절(靖節)선생은 술을 좋아했으며 지금의 정승인 기기장공(奇章公)은 돌을 좋아했다.

 

돌은 무슨 문장을 지닌 것도 아니며 소리도 없고 냄새나 맛도 없어서 앞에서 말한바 글과 술 같은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 기장공(奇章公)이 돌을 좋아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사람들은 모두 이를 괴이하게 여기지만 나(白樂天) 혼자만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친구인 이약유(李約有)는 “진정 나의 뜻에 적합한 것이라면 필요 없는 것이라도 나에겐 소용되는 바가 많다.”고 하였다. 역시 틀림없는 말이다. 제 뜻에만 맞으면 그뿐이니 기장공(奇章公)이 좋아하는 바를 가히 알 수 있는 노릇이다. 공(公)이 사도(司徒)라는 벼슬을 하고 있을 때 하락(河洛)이라는 곳을 다스리고 있었다.

 

집안 살림에는 썩 좋은 가산(家産)이란 없었고 몸을 보위할 좋은 물건도 없었다. 오직 동성(東城)에 집 하나가 있고 남곽(南郭)에 한 농막집이 있었다. 기와를 이은 번듯한 큰 관청 안에서는 찾아오는 빈객(賓客)을 선택해서 만났고 무슨 일이라도 자기의 성미에 맞지 않으면 항상 홀로 있기가 일쑤였다.

 

노닐고 쉴 때에는 돌과 더불어 친구가 되므로 돌을 많이 모아놓았는데 태호석(太湖石)이 제일 좋은 품(品)이었고 나부석(羅浮石), 천축석(天竺石)이 그 버금이 된다. 그런데 공(公)이 좋아하는 것은 으뜸가는 태호석(太湖石)이다. 이전에는 공(公)의 주변에는 관직에 있는 동료들이 경향 각지에 많이 있었지만 공(公)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은 오직 돌 뿐이다.

 

그래서 깊은 곳에 있는 것은 갈쿠리질 하여 건져내고 먼데 있는 것은 가져오는 일을 즐겨했다. 옥돌 같은 것도 갖다놓고 기석(奇石)도 날라 왔다. 사오년에 걸쳐 연속으로 수집하자 그럴듯하게 쌓이고 쌓였다. 공(公)의 이 물건에 대한 욕심은 유독 겸손하게 사양치를 않고서 동성(東城)의 주택이나 남곽(南郭)의 농막 집에 줄줄이 벌려 진열시켜 놓으니 풍성하다 돌이여! 그 돌의 형상은 한 가지 모양만이 아니다.

 

한데 엉키고 쑥쑥 멋스럽게 빼어 나온 것들은 진관신인(眞官神人) 같았다. 불그레하니 윤기가 있고 깎아지른 것이 마치 홀(笏)과 같다. 날카롭게 주욱 모가 져서 칼과 창 같은 것도 있고 또한 용(龍)이나 봉황(鳳凰)같은 것이 있다. 그런가하면 엎드린 것이 있고 움직이는 듯한 것도 있고 날아갈 듯 또는 뛰어갈 듯한 것도 있으며 귀신이나 짐승 비슷한 것도 있다.

걸어가는 듯한, 쫓아가는 듯한 그리고 공손한 것처럼 또 막 싸우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바람이 몹시 불며 비가 내리는 어스름한 저녁에 동혈(洞穴)이 트인 것도 있다. 구름을 피우며 우레 소리를 자아내는 듯한 그 높이 성한 모양을 바라보자니 가히 두려움을 안겨 주는 것도 있다.

 

안개가 개이고 경치(景致)밝은 아름다운 아침, 우람한 바위에 걸린 구름이 자욱이 보이는 그곳에 서늘한 산기운이 흔들리며, 먼 산의 거무푸릇한 빛깔을 덮고 피어오르는 구름 모양은 아주 친근히 사귀어 구경할 만한 것이다. 또 어스름한 새벽녘 날이 밝아 올 때까지의 경치의 형상에 무어라 이름을 붙일 수가 없었다. 백 길이나 되는 것도 한 주먹 안에 들고 천리나 멀리 떨어진 경개(景槪)도 한 눈에 들어오니 이것을 앉아서 다 볼 수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기장공(奇章公)의 뜻에 알맞은 추미인 것이다. 항상 공(公)으로 하여금 가까이 다가가 눈으로 보고 마음을 쏟아 자세히 살필 적에 사람들은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조물주가 돌을 만들어 놓을 때 어찌 그 돌 사이에 축경(縮景)에의 뜻을 두었을 것인가?”

9태초(太初)에는 혼돈(混沌)한중에 엉켜서 맺힌 결과로 된 것이지 우연하게 애쓴 공(功)으로 이뤄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 돌이 한 번 스스로 형용을 이루고 변치 않고 내려왔을 터이니 그것이 몇 천만년이 된 것인지 알지 못한다.

혹은 바닷가에도 가 있고 또는 호수의 바닥에도 잠겨있는데 키가 큰 것은 몇 길이나 되는 것이 있고 무거운 것은 대부분 천근가량 되는 것이 있다.

 

 

 

그런 것들이 하루아침사이에 채찍질을 하지 않아도 공(公)에게 올 수 있었고 다리가 없어도 그에게 닿았다. 이렇듯 그 기이한 것을 다투어 구하고 괴이한 것을 맞아들여서 이것이 기장공(奇章公)의 눈으로 항상 바라볼 수 있는 물건이 되었다.

공(公)이 또 그 돌들을 대우하기를 손님이나 친구를 알듯하며 친히 여기기를 어질고 밝은 사람같이 하고, 정중하게 여기어 보배로운 옥(玉)과 같이 했으며, 사랑하기를 어진 손자처럼 여겼다.

 

이러한 정성을 알지 못하는 돌이 그냥 불렀기 때문에 온 것인가? 뛰어난 물건을 가졌기에 여기에 오도록 한 것인가? 그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돌은 크고 작은 것이 있다. 그 품수(品數)를 네 등급으로 나누는데 갑(甲), 을(乙), 병(丙), 정(丁)으로 매겨놓고 갑(甲)의 상품(上品)이요, 병(丙)의 중품(中品), 을(乙)의 하품(下品) 등등으로 새겼다.

아, 슬프도다. 이 돌들이여. 백천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천지가 가운데에 흩어져서 이리저리 옮겨지다가 더 볼 수 없게 사라진다면 또 다시 누가 너를 알아주겠는가? 먼 장래에 나처럼 너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도록 하고 싶구나.

이 돌을 보고 이 글을 읽어보면 공(公)의 돌을 좋아한 내력을 알 것이다.


10

                         중국 항주의 서호에 있는 태호석

 

백낙천이 읊은 축경의 시정

천년 전 당(唐)대의 유명한 시인 백낙천(白樂天:772~846)은 그 당시에도 이미 수석의 집약된 축경을 터득하여 밝혀줌으로써 오늘날 우리 애석인들에게 축경의 세계를 알려 준 횃불이 되어 지금도 활활 타고 있다. 그럼 그가 칠순의 노경 때 수석의 축경을 관조하면서 노래한 주옥같은 시를 소개하면,


“삼산오악(三山五岳)의 수백 골짜기와 수천 봉우리, 거기에 따르는 자세한 경(景)들이 한곳으로 축소되어 그 속에 다 나타나 있도다. 백 길이 넘는 봉우리도 한주먹 안에 담겨져 있고 천리 밖 저 멀리 떨어진 경치도 한눈에 들어오니 이것을 가만히 들어앉아서 다 볼 수가 있도다. 신이 돌을 만들 때 어떻게 그 돌에다 축경의 뜻까지 두었는고.”

참으로 감탄을 금할 수 없는 명문(名文)이다.

 

11그리고 또 하나 뺄 수 없는 그의 명문은 그가 하나의 작은 돌에서 골짜기가 깊이 파여진 것을 보고 금방 상상의 나래를 펴 그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벽계수의 낭랑한 물소리를 들으며 읊기를,


“자갈돌 사이사이를 흐르는 물소리가 거문고 소리와 같다. 한가롭게 눈을 감고 조용히 들으니 마음의 더러움을 맑게 씻어준다. 양쪽 골짜기에 이끼가 푸르게 돋은 이 작은 돌을 우습게 보지마라. 긴 밤 그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만금(萬金)과도 바꿀 수 없다.”


 

우리 애석인 가슴속에 꼭 와 닿는 천하의 명문장이다. 다시, 백낙천이 여러 가지 돌들의 온갖 형상을 낱낱이 묘사한 문장을 보면 대단히 감동적이다.

“……풍성하다 돌이여! 그 돌들의 형상은 한 가지 모양만이 아니다. 한데 엉키고 쑥쑥 멋스럽게 빼어나온 것들은 그 신령스러운 언덕에 신선한 구름이 머물며, 단정하고 위엄 있게 꿋꿋이 선 것은 진관(眞官) 신인(神人) 같다. 불그레하니 윤기가 있고 깎아지른 것이 마치 홀(笏)과 같다. 날카롭게 모가 져서 칼과 창 같은 것이 있고 또한 용과 봉황과 같은 것이 있다.

 

그런가 하면, 엎드린 것이 있고, 움직이는 듯한 것도 있고, 날아갈 듯 또는 뛰어갈 듯한 것도 있으며, 귀신이나 짐승 비슷한 것도 있다. 걸어가는 듯, 쫓아가는 듯한, 그리고 공손한 것처럼, 또 막 싸우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바람이 몹시 불며 비가 내리는 어스름한 저녁에 동혈(洞穴)이 트인 것도 있다.

 

구름을 피우며 우레 소리를 자아내는 듯한, 그 높은 산 모양을 바라보자하니 가히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이 있다. 안개가 개이고 경치 밝은 아름다운 아침, 우람스런 바위에 걸린 구름이 자욱하게 보이는 그 곳에 서늘한 산기운이 흔들리며, 먼 산의 거무푸릇한 빛깔을 덮고 피어오르는 구름모양은 아주 친근히 사귀어 구경할 만한 것이다. 또 어스름한 새벽녘, 날이 밝아질 때까지의 경치 형상에 무어라 이름붙일 수가 없다.”


손바닥 위에 놓여지는 산수석 한 덩어리에서 수 천리 떨어진 산악(山岳)의 전경을 한 눈 아래에 다 바라보면서, 거기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히 끼어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또 아침과 저녁이 깃드는 광경을 아울러 계절 따라 변하는 사계절의 산 경치를 동시에 다 헤아릴 수 있는 풍요로운 정서…….

 

뿐만 아니라 계곡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물소리, 숲 속의 산새 소리와 짐승의 울음소리, 수림(樹林)의 다양한 광경을 다 마음속으로 감지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넓고 넓은 세계이다. 끝없는 상상의 날개를 펼치면서 사색의 구름다리가 하염없이 전개되는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경지인 것이다.

 

 

성주석(醒酒石)과이덕유(李德裕)의평천장(平泉莊)

12

 

이덕유가 사랑했던‘有道’라는 刻字가 새겨진 돌.

이덕유(李德裕)2)의 동도(東都) 평천장(平泉莊)은 낙양(洛陽)에서 삼십 리 거리에 떨어져 있다. 꽃과 나무와 그 누각은 신선이 사는 짐과 맡고 빈 난간이 서로 마주대하여 길게 뻗쳤다. 샘터에서 흐르는 물은 그것을 휩싸고 돌아 흐른다.

듬성듬성 파 놓은 축산(築山)의 형상은 무협산(巫峽山)과 동정(洞庭) 십 리 봉에서 흘러내리는 아홉 개의 물갈래가 바다까지 미치니, 이것은 강산의 경치를 나타낸 형상이다. 질러가는 길가에는 평평한 돌이 하나 있는데, 손으로 닦으면 온통 구름과 안개, 용과 봉황의 무늬 결이 그리고 초목의 형세가 은은히 나타난다.

처음에 이덕유가 평천장을 다스릴 적에는 먼 곳 사람들이 이상한 물건들을 숱하게 갖다 바쳤던 것이다. 그는 평천장에 제(題)하여 시를 짓기를,


“천수현(天水縣) 오른쪽 땅을 다스리는 제조(諸條)가 말하는 새를 바쳤고, 일남 땅 태수는 이름 난 꽃을 보내왔다.”


이덕유가 평천 별장에 있을 적에 천하의 진기한 나무와 괴석을 정원과 못에 모아다 놓고 구경하였다. 거기에 있는 성주석(醒酒石)은 덕유가 가장 보배롭게 여기고 아끼던 것이다. 술에 취하면 곧 그 돌 위에 걸터앉곤 했다.

이덕유가 평천장(平泉莊)에 있을 때 자손 훈계하는 기록에서 말하기를,


“평천장을 팔아먹는 자는 나의 자손이 아니다. 또 평천의 한 그루의 나무, 한 덩어리의 돌이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나의 자손이 아니다.”라고 일렀다.

당나라 장종(莊宗: 923~925)때에 장전의(張全義)란 사람은 字가 국유(國維)요, 감군(監軍) 벼슬이었다. 그는 일찍이 이덕유의 평천장에 있는 성주석을 가져갔던 것이다. 그 후, 덕유의 손자 연고(延古)가 전의에게 편지를 보내어 다시 돌려주기를 원했다. 감군이 벌컥 성을 내며 말했다.


“황소(黃巢)의 난리가 있은 뒤부터 낙양의 정원들이 그전처럼 지켜져 온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찌하여 홀로 평천장의 돌만 온전하겠는가?”

정의는 일찍이 황소의 적진 중에 있을 때에 자기를 비방했었다 하는 혐의를 연고에게 뒤집어씌우고는 크게 노하여 그를 때려 죽였다.

평천 성주석은 옥의 성질처럼 맑은 것으로 소웅궁으로 가져갔었는데 그 소웅궁이 불타버렸다.

송(宋) 인종(仁宗: 1023~1050)이 평천 땅을 갈라서 복로담의 월(越) 한익왕(韓翼王)에게 하사하였다. 이 한익의 아들인 단양군왕은 절개를 지키어 그 정원을 이어받은 다음 땅을 파서 기교한 돌들을 꺼내기를 전후에 걸쳐 수만 덩어리였는데 기이하고 훌륭한 것이 많았다. 하늘로 떠받들만한 성주석이 그 중의 하나였다. 이 돌 위에는 이덕유가 새긴 글이 남아 있는데,


“옥을 감추고서 맑게 빛남을 품으니 한적한 뜰은 날마다 맑고 깨끗하다. 한 덩어리의 천지 사이에 본시부터 외롭게 생겨난 돌이다.”


소성중(紹聖中: 1094~ 1097)에 임금의 뜻에 의하여 그 돌을 날라다가 궁중으로 돌아가서 월대(月臺)뒤에 세웠다. 단양왕(丹陽王)의 후손이 은밀히 찾아와서 성주석이 있는 곳이라 하였다. 지금 그 돌은 대궐 안에 있다. (운림석보(雲林石譜))


찬황공(?皇公)의 평천장은 주위가 십 리요, 누대가 백여군데나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도 그 옛 터는 아직 남아 있다. 천하에 기이한 꽃과 이상한 풀이며 진기한 소나무와 괴석들이, 그 가운데서 극치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덕유가 스스로 <평천초목기(平泉草木記)>를 지었는데, 오늘날에는 그것들 모두가 황폐해지고 없어져 버렸다.

 

다만 전나무, ‘주자백(珠子柏)’이라는 측백나무, 연방왕조(蓮房王藻)라는 연꽃마름 등이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괴석의 명품이 여러 가지로 매우 많이 있었지만 낙양성에 있는 유력자가 다 가져가버렸다. 오직 예성석(禮星石)과 사자석(獅子石)만은 지금 도학사택(陶學士宅) 이원별야(梨園別野)에 옮겨놓게 되었다.

하남지(河南志)에 기록된 바로는 하남에 있는 커다란 집 남향에 파사정(婆娑亭)이 있는데, 그곳 기석이 있는 장소에는 이덕유의 성주석을 물려 받아 그것이 걸차게 보이도록 林木을 심어서 자연스러움을 나타내었다. 오늘날 그 돌을 파사석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 그 나무의 이름을 딴 것이다. (매씨담록(買氏談錄))

 

 

13구양수(歐陽修)의 愛石

한 기운이 맺히어 돌로 되어 흙을 지고서 나오는데, 그 형상은 기이하고 괴이(怪異)하다.

혹시 바위의 구멍이 훤히 뚫리고 봉우리와 재와 층이 진 능선(稜線)들은 모두 옛 여신이 다스리고 난 나머지, 채찍질에 의하여 쫓겨 가 숨어버린 것들이다.

 

이에 이르러 까치가 날아서 득인(得印)하고, 자라(거북류)가 화(化)하여 어제(御題)하며, 양을 꾸짖고 호랑이를 쏘니 정질(挺質)함이 오히려 아직껏 있어서 날아다니는 제비와 우는 물고기 류(類)의 형상을 가히 볼 수 있다.

우공편(禹貢篇)에도 나오며 이상한 것은 송(宋)나라 도읍에 별이 떨어지기도 하여 물상(物象)이 완연한 실지와 그럴듯하게 비슷하다.14

 

 

「운림석보(雲林石譜)」

천지의 지정(至精)한 기운이 맺히어 돌로 되어 흙을 지고서 나오는데, 그 형상은 기이하고 괴이(怪異)하다. 혹시 바위의 구멍이 훤히 뚫리고 봉우리와 재와 층이 진 능선(稜線)들은 모두 옛 여신이 다스리고 난 나머지, 채찍질에 의하여 쫓겨 가 숨어버린 것들이다.

그 종류는 한 가지가 아니다. 이에 이르러 까치가 날아서 득인(得印)하고, 자라(거북류)가 화(化)하여 어제(御題)하며, 양을 꾸짖고 호랑이를 쏘니 정질(挺質)함이 오히려 아직껏 있어서 날아다니는 제비와 우는 물고기 류(類)의 형상을 가히 볼 수 있다.

 

괴이함은 우공편(禹貢篇)에도 나오며 이상한 것은 송(宋)나라 도읍에 별이 떨어지기도 하여 물상(物象)이 완연한 실지와 그럴듯하게 비슷하다.

비록 한 주먹만한 돌도 많으면 능히 일천 바위의 빼어난 것을 쌓을 수 있으며 큰 것은 가히 정원에다 벌여놓을 만하다. 작은 것은 책상위에서도 놓아서 숭산(嵩山)의 작은 모양으로 볼 수 있게 하며 또 거북이 엎드린 것을 대면하게 되니, 앉아서 맑은 생각을 솟게 한다.

 

그러므로 평천(平泉)의 진기한 것들은 덕유(德裕)의 비장하고 있는 풍부한 보배이다. 덕유(德裕)가 무종(武宗)(841~846)에게 바친 모든 돌은 괴기한 돌로서 마땅히 사랑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좋아하고 숭상하는 것들은 짐짓 그 스스로가 모두 같지 않다.

이는 비록 좋아하는 바가 저마다 다 다르지만 그러나 그 좋아할 어떤 특별한 까닭도 없으니 대부분 충분한 무엇을 말할 수 없다. 성인이 일찍이 말했으되, 인자(仁者)는 산을 즐기고 돌을 좋아한다 하였으니, 곧 산을 즐기는 뜻은 대개 마음의 고요함을 갖고서, 오래 사는 사람이란 여기에서 얻었음을 말하는 바가 되는 것이다.

 

모름지기 전에 이르기를 육우(陸羽)3)의 술, 대개지(戴凱之)4)의 대나무, 선대고(鮮大古)의 종이? 붓? 벼루? 먹, 구양영숙(歐陽永叔)의 모단(牡丹) 또한 모두가 내력을 적은 글이 있는데, 오직 돌만은 홀로 그것이 없으니 한스럽다.

운림거사(雲林居士) 두계양(杜季揚)5) 이 일찍이 그 괴이한 것을 모아 그 갈래와 품수의 차례에 관하여 도읍 근처에서 나오는 윤기 있고 마른 것으로 분별했으며 뛰어난 질을 판별하여서 편(編)에 간략히 썼으니 이 석보를 마땅히 전해야 한다..

송나라 소흥(紹興) 계축년(癸丑年)(1133년) 여름 5월 보름 궐리(闕里)에 사는 공전(孔傳)이 이 序文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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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동파가 사랑했던 雪浪石
 

 

<어양석보서>

우승유(牛僧孺)6)는 돌을 좋아한 나머지 뛰어나게 좋은 돌들을 가지고 있었다. 근대에 와서 미불(米?)과 같은 지위 높은 양반도 역시 돌을 좋아했다.

미불이 무위군장(無爲軍長)이 되었을 때이다. 군택(郡宅)에 괴석이 있었다는데, 미불은 관원의 예복을 갖추어 입고 가서 돌을 향해 절을 하면서 석장(石丈) 즉 ‘돌 어르신’이라 불렀다. 이때 사람들은 이를 나무라면서 가엾게 여겨주지도 않았다.

연산(硏山: 미불이 소장하던 山水石) 가운데에서 일명 희령(喜嶺)이라고 하는 그 위에 한 천지가 있다. 무릇 다른 물을 빌려오지 않아도 능히 붓을 적실만하니 천지간에 기이한 돌이다.

동파(東坡)도 돌을 좋아하여 희구(喜口)라는 민가에서 돌을 하나 얻어가지고 ‘희중구화(喜中九華)’라 불렀다. 이것은 구화산의 모양을 축소한 듯하여 말한 것이다.

미불이 돌의 형상을 보는 법 네 가지가 있다고 했다.7) 첫째, 수(秀) 즉 기품이 빼어나야 하고, 둘째 수(瘦) 이것은 선이 강하고 군더더기가 없이 파리하게 마른 형상을 뜻하며, 셋째 아(雅) 즉 아취가 있고 담백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루 곧 구멍이 뚫려 있어야 한다 하였다. 이 네 가지가 비록 돌의 전체의 미를 나타내는 말은 아니지만 역시 그럴싸한 것이다.


중국 명(明)대의 「소원석보(素園石譜)」

임 유 린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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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돌들은 명대의 유명한 애석가인 임유린이 아껴 사랑했던 돌들이다. 질과 색이 뛰어난 마노석(차돌) 종류로 대추알만한 작은 것들이다. 일찍이 소동파가 밀가루떡과 바꾸어 모았던 내력을 전승하여 명대에도 이런 돌을 아껴왔다.

 

소원석보 해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석보(石譜)로는 송(宋)대의 <운림석보(雲林石譜)>와 명(明)대의 <소원석보(素園石譜)>를 꼽는다. 여기에 소개하는 <소원석보(素園石譜)>는 1613년 간행된 임유린(林有麟)의 저서이다. 저자는 운간(雲間)지방 사람으로 명나라 때 화가이며 별명은 인보(仁甫)이고, 호는 충제(衷齊)이다.

저자는 갖가지 괴석들을 열렬하게 모았으며, 자신의 정원인 소원(素園) 가운데에 ‘현지관(玄池館)’이란 건물을 세워 여기에 그 돌들을 진열 소장하였다. 그리고 이 소장석들은 그가 스스로 그림 그리고 설명을 붙였으며, 또 옛

날 선비 애석가들의 시문과 행적을 조사하는 동시에 그 사랑했던 옛 돌의 형태도 추정해 그려보곤 했다. 이런 애석 편력이 바탕이 되어 <소원석보(素園石譜)>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저자의 자서(自序)

돌이 큰 것으로 높고 험준한 모양의 것은 중국의 다섯 영산(靈山)인 동쪽의 태산(泰山), 서쪽의 화산(華山), 남쪽의 형산(衡山),북쪽의 항산(恒山), 중앙의 숭산(崇山)이 오악이 그 전부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하여 도교의 서책에 나오는 바, 산수경치가 뛰어난 동천복지(洞天福地)는 영혼마인(靈魂魔人: 신선)이 사는 곳으로 모두 아름다운 청색의 명석을 산출하고 있다.

나는 본래 태어날 때부터 천성이 곳곳을 찾아 방랑하기를 즐겼다.

 

어느 해 태호(太湖)의 깊은 골짜기를 가던 중 안개가 낀 듯 몽롱한 지대에 들어가 서쪽의 석성(石城)에 이르렀다. 여기서 멀리에는 천태산(天台山)과 호수와 숭산(崇山)이 아득한데 험준하고 기이함을 다투기라도 할 듯이 기러기 떼처럼 산과 산이 중첩되었다.

여기에 가슴을 시원히 씻어내는 것 같은 절벽의 층운(層雲), 이 속을 헤치고 돌아온 철새와 같은 감회에 잠긴 적이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것에 익숙하였으며 책을 읽어서 진작에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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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부친이 유산으로 남기신 집이 있고, 맑은 연못이 곁들여지고 또 두 개의 돌이 있었다. 좀 떨어져있는 왼쪽 집에서 어렸을 때부터 그 돌에 관한 노래를 거문고 타며 불렀다. 그리하여 일상생활 중에서 한가할 때마다 향기를 맡거나 조용히 돌에 감격하여 격식을 갖추어 그 돌의 존엄성을 모시는 분의 방을 찾아뵙기도 하였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에, ‘소원(素園)’이라고 불리는 이 정원에 ‘현지관(玄池館)’이라는 건물을 세워 돌들을 모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머나먼 옛날 삼오(三吳)시대 이래의 명석이 차츰 모이게 되었다.

비는 오래 묵은 집으로 깊이깊이 스며들고, 가을의 시원한 마음자리는 하염없는데, 숲 속 바람은 돌 모서리에 스며들어 돌들은 한 편의 곡조를 연주하는 듯하다. 방안의 책상은 미소를 머금고 말이 없으며, 사람은 깨끗이 몸을 씻고서 무아의 경지에 이른다.

 

나는 이전에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선술(仙術)에 대한 책이나 명화(名畵)나 명악기 그리고 값비싼 정(鼎: 왕위나 권위의 상징) 등이 얼마든지 있는데 어찌하여 그런 것들을 멀리하고 있을까? 돌이야말로 가장 선(禪)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이다.

옛날에 돌을 모아놓고 이것을 청중으로 삼고서 불경을 강의하였다는 고승인 도생(道生)은 화살 앞에서도 태연히 절을 하면서 평상시의 태도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또 언, 책에 씌어진 유명한 미원장(米元章)의 구화석(九華石)은 신과의 만남이라고 할 만큼 이 돌을 맞이한 미원장(米元章)의 문장과 글씨는 거침없이 생동했다. 옛날 사람들은 이처럼 돌이 갖고 있는 천지의 올바른 기운에 순종하여 깨우치는 바가 있었다.

 

그런데 중국의 전국토 구주(九州) 밖에서는 또 다른 구주(九州)의 외국이 있다 한다. 그들 나라에서는 아무리 오악과 같이 잘생긴 명석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되어 버려질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런 돌에 관한 책을 짓더라도 결국 그것은 자기만이 즐기는 책으로 끝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설적인 명산으로 일컬어지는 화산(華山)이나 태산(泰山)이나 형산(衡山), 숭산(崇山)의 모습을 지닌 작은 명석이 갖추어 있은즉 여기서 나는 송(宋)대의 선화제(宣和帝)(1119년) 이후의 돌 그림과 돌에 관한 시가(詩歌) 등을 모아서 무려 네 권의 책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나의 친구인 황경(黃經)은 나의 저작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임유린(林有麟)의 취미는 옛 현인과 같다면서...

만 권의 책을 갖고 있다는 것은 단지 부귀의 즐거움만은 아니다. 나는 만 권의 책 말고도 그 이외에 다시 한걸음 더 나아가 일체의 천공을 넘어 신산 해진산(海珍山)에 올라서서 향기를 따르는 것으로 여겨진다.


<소원석보(素園石譜)>의 알찬 내용 >

- 이 책은 고금의 도서 서적을 검열하여 마음에 번뜩 떠오르는 명석이 있으면 그 모양을 그려두었다가 뒤에 그 돌에 관한 시문이나 노래를 편집한 것이다.


- 나는 성격적으로 산수를 즐긴다. 그리하여 내가 돌을 안다하더라도 미원장(米元章)보다는 돌을 잘 모르지만, 그래도 돌을 받들어 바라보고 이것은 좋은 돌이구나 하고 생각되면 그림으로 옮겼다. 이런 동안에 이들 그림이 모여져서 책이 되었다. 이제 와서 책을 다시 펴보니 돌들이 엄연히 실물처럼 나의 눈앞에 나타나있는 것이다.


- 명석은 많은 명산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내가 써놓은 것은 내가 본 명산의 범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내가 열개의 돌에 대해 쓰고자 했지만 그중 하나나 두개의 명산밖에 더 쓰지 못하였더라도, 그러나 여러분은 한 점을 보면 전체를 아는 사람들뿐이므로 그 산에서 어떤 돌의 모양이 우러나오는가 하고 대개는 전체의 모양을 접을 것이라 생각된다.


- 돌의 묘미는 한결같이 격조 높은 소리가 있더라도 모자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모양을 이루고 있어도 그 묘(妙)가 없는 것은 아무리 오래된 돌이라도 이것을 기록에 넣지 않았다.

하(夏)나라의 우(禹)왕이 그 굴구멍으로 들어갔다는 묘석(墓石)이라든가, 청렴결백한 고관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재(家財)가 전혀 없어서 배가 가벼워 바다를 건널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대신에 바위를 실어 무게를 갖게 하였다는 그 거석 등이 예이다.


- 좋은 돌이라 하는 것은 이름 있는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시가와 문장이 만들어 붙여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다 모을 수는 없었다. 또 돌중에는 그 같은 품평을 받지 못한 것도 있다.

하지만 고귀한 옥일지라도 갈아야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유식한 사람은 반드시 그림들을 보고 좋은 돌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 돌에는 모양이 있는 것에 신령스러움이 있는 것이다. 돌 그림이 그려진 것에는 그 형상으로 그치지만 그 신묘한 점에 이르러서는 크세 생동한다. 돌 그림에서의 이 생동감은 갑자기 나타나는가 하면 또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은 그 신묘한 곳에서 노닐 수가 잇는 것으로 만약 깊고 깊은 천지의 이치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스스로 그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 그림은 돌 하나에 그림 하나로 많아도 셋이나 네 개의 그림으로 그친다. 그리하여 그 중에서 한결 좋은 모습의 것을 모았다. 전부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유명한 사람의 시가(詩歌)가 붙은 것이 많다.


- 이 책에 수록된 돌은 모두 좋은 면이 있어 손에 들고 즐길 수 있는 것들뿐이다. 그런 돌을 주로 모았다. 중첩되어 연이어진 산이라 하는 것은 그 산악들이 구름을 뚫고 솟아 있는 것이다. 또 별은 실제로 우러러 바라보는 것이지, 눈에 보이도록 별이 머물러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하늘로 치솟은 산형의 돌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하기위해 이 책에 돌 그림을 모은 것이다. 돌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림으로나마 그려서 즐겨보고자 하지만 소맷자락 속에 들어갈 작은 돌은 어느 것이나 옮길 필요가 없으므로 이런 그림의 돌은 수록하지 않았다.


- 미원장(米元章)은 어떤 한 돌(硏山石)을 벗으로 삼고 있었으나 결국 한 화려한 누각과 바꾸게 된 다음에 다시는 그 돌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붓을 들어 그 돌에 대한 생각을 그림으로 그렸다.

나는 지금 천하의 명석을 모아 한 권의 책을 편집하였다. 어째서 미원장(米元章)과 같이 한 돌의 면영만을 쫓을 필요가 있을까. 이렇듯 책이 지어져 서제에 놓일 때 온 방안에 수기(秀氣: 빼어난 경치)가 넘치며 집집마다 흥성할 것이다.


- 돌들의 형상은 한 가지 모양이 아니고 각양각색이다. 또 고사로 전하여질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의심이 가는 내용의 것이라도 그대로 전해지게 된다. 그리하여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명(命)하여 자(字)를 각(刻)하였다. 생각이 떠오르는 뛰어난 돌은 추정하여 그렸다. 변변치 않은 그림이지만 감히 이 책에 나의 솜씨를 싣도록 하였다.

18

 

<야매석보(冶梅石譜)>

야매(冶梅) 왕인(王寅)

해설

이 석보를 전반적으로 그 깊은 곳을 살펴볼 때, 수석의 근본 뜻을 충분히 말해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석보를 살펴보면 예부터 오늘날 말하는 산수석을 아꼈고 물형(物形)의 형상을 고루 찾고 있었다.

 

돌의 주름살과 피부, 살이 찌지 않고 파리한 모습, 괴이함과 박력과 드높은 기상, 이끼 낀 모습 등도 낱낱이 따졌고 또한 미원장(米元章)의 상석법(相石法)이 적용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돌의 크기로 보면 한 주먹 안에 드는 돌부터 정원석이 될 커다란 돌에 이르기까지 그 크기에 시비를 가리지 않고 충분히 완상했다. 큰 것은 큰 것대로의 맛,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의 별다른 맛을 찾았다. 크든 작든 한 덩어리로의 독립된 돌로서 그 형상이 기묘하여 어떤 품격과 아취가 있을 때 지체함이 없이 반갑게 맞이했다.

 

형상, 돌 형상의 이상적인 것은 태호석(太湖石)과 영벽석(靈璧石)에 기본을 두고 비유된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말없고 감각도 없으며 생각도 없는 돌 자체에 높고 높은 인격을 부여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돌과 대화를 나누었다. 수양의 돌로서 돌과 깊이 벗 삼는 동안 돌이 대답해주는 ‘돌의 목소리’도 마음으로 엿들을 정도로 깊은 경지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돌을 벗 삼고 바라보며 감상할 때에는 미처 생각지도 못할 넘치는 상상력으로 맞이했다는 점이다.

 

옛날의 전통과 고사(古事)에 인연을 맺어 생각하기도 했다. 만물의 온갖 형상을 상기하고 일상의 추억을 돌에 맺어서 감상했다. 너무나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때로는 터무니없을 정도에 이르지만 이로써 돌에 충분히 취할 수가 있었다. 실상은 이러한 점에서 돌을 사랑하는 흉위가 나타나는가 한다.

그 풍부한 상상력은 각박한 마음에서는 샘솟지 않는다. 만날 쫓겨 다니는 이해관계에만 몰두하여 인정을 잃어버린 그런 사람에게는 유머와 기지에 넘치는 상상력이란 바랄 수 없다. 먼저 ‘마음의 부’를 쌓으려는 여유를 가진 심성 앞에서 돌의 멋과 맛이 풍긴다.

 

그러므로 참된 애석이란 돌을 다루는 기술보다도 먼저 가다듬은 인격이 앞서야 한다. 다시 말해서 애석은 선비적인 취향이라는 것을 이 석보 전반에 걸쳐 은근히 나타난다.

 

19이 <야매석보(冶梅石譜)>는 중국 청(淸)나라 왕인(王寅)의 저작이다. 야매(冶梅)는 그의 자(字)이다. 왕인은 본래부터 시와 문이 뛰어났는데 그림으로 더욱 유명했다. 인물, 산수, 목석(木石), 난죽(蘭竹) 등 어떠한 그림이든지 정교하게 일품으로 그렸다. 그 중에서 돌 그림이 특히 뛰어났다.

이 석보의 서문을 쓴 송석(松石)의 글을 보면 돌만을 전문으로 한 석보가 없으니 그대가 그것을 꾸미면 후학들의 자료가 될 것임을 말해주었고, 그 얼마 뒤에 왕인이 돌 그림 65장을 그려서 보여준 것이 바로 이 석보가 된 것이다.

 

왕인은 그 돌 그림을 보여주면서 선화년간(宣和年間)(1119~1125)에 만든 석보가 있었지만 원본은 오래되어 없어지고 그 뒤의 사본은 신통치 않지만 나무라지 못할 것이 있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송석은 서문 마지막에서 또 말하기를 서로 사귄지 오래 되었으나 이제 비로소 왕인의 선비로서의 기량 있는 한 단면을 보았다고 칭찬하였다.

왕인은 옛 돌 그림을 참작해서 그린 것도 있음이 나타20나고, 화제(畵題)도 친히 지어 쓴 것으로 되어있다.

송석이 서문을 쓴 연대가 1880년이고 판각된 해가 1882년이니 120여 년 전에 그려진 돌 그림인 것이다. 돌 그림 하나하나에 붙여진 화제(畵題)를 보면 그 풍부한 정감과 상상력을 헤아릴 만하고, 우리들의 수석에 대한 연상과 상상의 세계에 많은 참고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점수가 많아서 편집자가 재량껏 취사선택하였다. 화제(畵題)의 원문을 생략하였으며 번역을 간단히 줄이고 뜻만 살린 곳이 여러 군데 있다.


옛先人들의 怪石圖와 詩文

 

<十竹齊書畵譜>에서

22
〔시문〕돌의 영롱하고 기이한 것을 찾고자 하니 이 이상 더 빼어난 것이 없는 것 같다. 돌의 뼈대가 기골차고 공중으로 치솟아 날아갈 듯 싶다. 곧고 절개 있는 이 돌에 감탄하여 “돌 어르신네여!!” 하고 절하였은즉, 이 그림을 잠시 훔쳐보니 오히려 맑은 바람이 일어나는구나.

-손정준-


23

〔시문〕이 한 조각의 돌은 천공에 의하여 다듬어져 이뤄졌으니, 무르녹은 향기가 부드럽게 풍기며 빛이 맑고 맑다. 평지와 깊은 굴에 구름 안개가 머물고 곧은 결 비친 문채엔 핏빛이 영롱하다. 옛 골짜기에 이미 초록의 꿈이 사랑스럽고, 이 돌이 놓인 그윽한 방안엔 지금 玉人의 맹세를 맞았다. 그대를 향해 단아하게 마주 앉으니 천기가 혼화한다.

-몽 두-

 

24

〔시문〕텅 빈 굴 속이 바위 속으로 뚫려서 화안한 기운으로 푸르게 바깥이 내다보인다. 텅 빈 굴 속 바깥으로 보이는 강물에 다락집(누각)이 문채를 띄우고 있다. 仙客은 그 누각에 앉아 한가롭게 달을 희롱하고 있으며, 피리 소리는 동정호위의 구름을 불어 갈라놓는다.

- 오 능 -

 


25

〔시문〕이 돌 중간에 구름 안개가 걸쳤으며 먹구름 비가 뿌린다. 높고 높은 봉우리가 어둠을 뚫고 우뚝 치솟았는데, 이태백이 노닐다가 떨어질 듯싶구나. 아마도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서 드높은 하늘 구멍을 뚫었기에 치솟은 봉우리. 이 수려한 모습을 바라본다.

- 장세화-

 

26
〔시문〕우연히 자네 집 앞에 도달하니 마침 생각이 떠올라서인지 한 봉우리의 기석이 내 앞에 다가온다. 이 돌을 천금주고 사려 했지만 당초부터 값이 없었다. 백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듯한 그 우람한 구멍으로 가만히 통해 보니 자그마한 하늘이 보인다. 꽃이슬에 그윽한 향기가 잠겨있어 푸르른 윤기가 돋보이는데, 여기에는 달 속에 숨어있는 선녀의 그림자가 머금어져 있어서 그지없이 어여쁘고 사랑스럽다. 그 자줏빛에 녹색이 어울린 연꽃의 숨은 꿈은 제주의 저녁 노을가에 이르지를 못하여 못내 아쉬워한다.

- 곽재인-

27
〔시문〕이 돌을 어루만져 본 즉은 뒤틀리고 얽혀 파리하게 뼈만 남았는데 두들겨 보면 찬서리 흩날리듯 청아한 소리가 난다. 터럭 같은 피부가 층층이 돋아나오고 곳곳에 구멍이 뚫려 터졌다. 이 돌이 딴 데로 날아가 버릴까 걱정스러워 여러 번 감추기도 하면서, 항상 나와 더불어 함께 살고자 한가로이 떠받들어 모시곤 한다. 미원장이 괴벽스럽게 돌 좋아했던 것처럼 돌모시는 이 마음을 의아스럽게 여기지 말라. 이 돌의 비밀을 공개하면 모두들 그 채색에 깜짝 놀랄 것이다. - 곽지벽-

28
〔시문〕흐르는 물가에 접해 있는 듯한 이 돌을 그리고자 붓을 잡으니, 붓끝에서 구름 연기가 흩어지는 것 같다. 이 돌의 깎아지른 가파로움과 그 영롱한 모습을 나타내니 별달리 해맑은 하늘 끝이 탁 트인다. 좋아서 서화로 나타내본 즉은 모름지기 술을 깨어, 이덕유(李德裕: 唐나라 재상)가 극진히 사랑했던 평천장의 성주석을 찾았음인가?

- 영남노원-

 

 

〔시문〕이 돌의 우뚝 솟은 그림자가 어지러이 움직이면서 그 높은 형세가 기품 있게 나타난다. 옛날에 흘러 지나갔던 구름이 다시 마주쳐와서 얼굴을 스치는데 이 괴이하게 생긴 돌은 주먹보다 작다. 이 작은 종이에 돌 그림을 그리자하니 푸른 먹물만 떨어지면서 메마른 붓 끝에 차디찬 연기 기운이 감돌아 나른다. 이 날아오르는 기운은 돌 좋아하는 미(米)씨 집으로 가는 나룻배에 옮겨가는 것 같다.

- 양문양

 

29
〔시문〕신령스럽도록 공허한 구멍이 뚫려 있으며 기이한 변화가 숨어있는 모습은 또한 그지없이 아담하다. 세게 두들겨 보면 처음엔 소리가 없다가 종이 우는 것 같은 소리가 퍼진다. 내가 만약 이 돌을 만나기 위해 그 옛날에 놓여있던 터전을 찾아 갔다면 몇 번씩이나 이 두세 봉우리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 전유적 -

30

〔시문〕공교롭게 생긴 바위 구렁을 백지에 옮기고자 붓머리로 찍어 그려본 즉, 이 괴석의 자태에서 구름이 생기고자 하는 것 같아서 가히 이 무더위를 식혀볼만 하구나.

이 석보에 민틋하고 또 드높은 봉우리를 그려내니 쪼아서 만든 것보다 더 낫고, 흰 부분은 좋은 구슬과 같아 치면소리조차 없다. 책과 더불어 편안히 정을 같이하는 같다

- 원능-

31
〔시문〕은은하게 돋아나온 문채는 표범과 같고 파리한 모습은 진기한 용과 같다. 이 어여쁨은 미인의 마음을 머금은 듯 하고 그 영롱스레 아름다운 모양은 도사의 말문을 막는다. 옛날의 미원장처럼 이 옥과 같은 돌을 소맷자락 속에 넣고자 한다

- 최 표


괴석의 역사와 전통 괴석(怪石)의 전통과 형태

괴석의 전통과 역사

괴석은 현대 수석이 있기 전 우리 조상들이 즐기던 애석문화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애석취미를 수석이라 부르듯 선인들은 그들이 즐겼던 돌을 괴석이라 불렀던 것이다.

괴석이라는 말이 최초로 쓰인 것은 중국의 「서경(書經)」이다. 이 책의 내용을 간추리면 ‘아득한 옛날 중국의 전설적인 왕인 우왕(禹王)이 치수사업을 벌이던 중 청주라는 고을에서 괴석이 산출되었다. 이에 그 돌을 공물로 바치게 했다.’ 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후대 사가들이 쓴 것이라 그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다.

 

두 번째로 괴석이라는 말이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문헌에서이다. 조선 권문해(1534~1591)가 쓴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郡玉)」이 그것으로 이 또한 후대에 기록된 것이라 신뢰성을 입증하기는 어렵다.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가락국 거등왕이 이웃나라 칠점산에 사는 담시선인을 초청하였는데 담시선인이 왕에게 연화문이 새겨진 돌을 선물하여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라 적혀 있다. 권문해로부터 1300여 년 전의 일인 것을 생각하면 어디에 근거하여 기록했는지 알 길이 없다.

더 거슬러 올라가 지금으로부터 4천여 년 전부터 인류가 돌을 생활과 직결된 실용적인 목적 이외의 관점에서 본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돌을 형이상의 세계에서 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이 지녔던 사상이나 신앙과도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금을 통해 본 괴석의 형태

괴석의 형태는 아직도 궁중의 후원에 가면 전래석들이 많이 남아있어 이를 보기에 큰 어려움이 없다. 옛 문헌들을 보면 괴석도 현대수석에서처럼 돌을 보는 기준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송나라 때 미불(1051~1107)이 창안한 ‘돌의 사원칙’이 아닐까 싶다. 미불이 창안한 이 사원칙은 괴석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수(秀)- 수려한 기품이 있어야 한다.

수(瘦)- 파리하게 메말라야 하며,

준(?)- 주름이 져야 하고,

투(透)- 구멍이 파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괴석이 모두 이와 같은 기준을 따랐던 것은 아니다. 형태에 따라 기준에서 벗어난 돌들도 얼마든지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문양석이라든가 형상석 등은 이런 기준에서 벗어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애완했다.

조선조의 학자 서거정이 쓴 「석가산기(石假山記)」를 보면 당시 괴석의 흐름을 알 수 있다. ‘이가 돋고 모가 지고, 뿔이 나고 벌레가 갉아먹은 것도 같고, 물결에 일그러진 것과 같은 특이하고 괴이한 형상은 실로 귀신이 만들어낸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괴석이라 해서 꼭 뚫리고 파인 것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쓴 「태호석기」에도 ‘돌의 형상은 한 가지 모양만은 아니다. 엎드린 것이 있는가 하면 움직이는 듯한 것이 있고, 날아갈 듯 또는 뛰어갈 듯한 것도 있다. 또한 귀신이나 짐승 비슷한 것도 있다.’라고 했다. 송대의 시인 소식은 그가 즐겼던 문양석에 대해 ‘오늘날 제안 땅 강 위쪽에는 이따금 아름다운 미석들이 나오는데 옥과 함께 놓으면 분간할 수가 없다.

불그레하고 노랗고 흰색이 많고 무늬가 사람의 지문과 비슷하여 정밀하고 분명한 것이 사랑할만하다.’고 「괴석공」에 기록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의 문양석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우리나라 궁중 전래석들도 선인들의 괴석 취향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궁중에 전래되어 온 괴석들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산수경석 종류이다. 대개가 인공으로 골짜기와 봉우리를 만들고 돌의 하단 중심에 투를 뚫어놓았는데 이는 돌의 사원칙에 나오는 기준에 따라 준과 투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하단 중앙의 큰 구멍은 음과 양의 조화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종류는 추상석에 가까운 돌들로 변화가 많거나 구멍이 뚫렸다든가 서로 다른 석질들도 뒤엉킨 것들이다. 이는 돌이 지닌 신비감 그 자체를 즐겨 보았던 것이라 생각된다.

괴석과 현대 수석은 몇 가지 다른 점이 발견된다.

 

먼저 현대수석에서는 수석과 정원석을 구분하고 있지만 괴석에는 이를 통틀어 괴석이라 불렀다. 다음으로 질에 대해서도 오늘날의 수석은 모스 경도 4이상의 경질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괴석에서는 물을 잘 빨아올리는 돌이면 석회석이거나 종유석을 가리지 않고 즐겼다. 여기에 두들겨서 쇳소리가 나는 돌이면 더욱 좋은 돌로 보았을 뿐이다.

 

세 번째로는 괴석은 돌의 밑면에 대해서도 전혀 까다롭지가 않았다. 현대수석은 어떤 장르의 돌이라도 밑면의 안정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괴석에서는 감상할만한 요소만 있으면 이를 분이나 좌대로 조절하여 감상했다. 마지막으로 연출이 자유로웠다. 괴석에서의 연출은 돌을 귀하고 신비롭게 보이도록 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그래서 화려하게 조각한 좌대나 화로, 솥, 향로 등을 사용하여 어떤 돌이거나 그 위에 올려놓기만 하면 되었다.

이처럼 괴석과 수석은 돌을 대상으로 미적 쾌감과 정서적 위안을 얻는다는 정신세계에 있어서는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돌을 수용하는 영식에 있어서는 전술했던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1) 미불(米?) (1051~ 1107):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 字는 원장(元章). 호는 해악(海岳). 양양(襄陽) 출생이어서 미 양양(米 襄陽)이라고도 부르며 남궁(南宮)이라고도 함. 필법은 침착 통쾌하고 준마(駿馬)를 탄 듯하다고 함. 그림은 산수화를 잘 그렸는데 후세에 남화(南畵)의 대표로 불리움. <배석도(拜石圖)>가 유명하며 저서는 <서사(書史)>, <화사(畵史)>, <연사(硏史)> 등이 있다.

 

2) 이덕유(李德裕: 787~ 849): 당(唐)나라 사람. 젊어서 학문을 많이 닦았고 대절(大節)이 있었음. 무종(武宗) 때 정승이 되어서 위엄과 군세를 독차지 했으며, 뒤에 그를 꺼리는 사람의 모함을 당하여 좌천되었다가 죽음.

 

3) 육우(陸羽): (720~804) 중국 당(唐)대 문인. 문명을 부정, 자연복귀주의(自然復歸主義) 정신운동을 전개. 다(茶)를 사랑한 은일(隱逸)의 다인(茶人).

 

4) 대개지(戴凱之): 중국 진(晋)나라 사람. <죽보저작(竹譜著作)>이 있음.

5) 두계양(杜季揚): 중국 남송(南宋)때 사람. 문인 이름은 두관(杜?), 자(字)는 계양(季陽), 호(號)는 운림거사(雲林居士), 그의 저작 <두관운림석보(杜?雲林石譜)>는 권위 있음.

 

6) 우승유(牛僧孺): (779~847) 당나라의 문인, 정치가. 방정(方正)하여 어사(御使)를 여러 번 지냈고 정승이 됨. 돌을 매우 사랑했음.

 

7) 미불이 말한 돌의 네 가지 원칙이 여기에서는 좀 다르게 표현되었음을 미리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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