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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 돌에서 오묘한 자연미를

高山 | 2009.08.12 14:54 | 공감 0 | 비공감 0

 

수석은 곧 자연이다.

 

 

하나의 돌 속에 삼라만상의 신비가 숨쉬고 있음은 비단 꼭 수석인이 아니더라도 공감하는 사실일 것이다. 수석을 대하는 마음은 바로 자연을 마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자연 앞에서 모든 인간은 겸허해진다. 그 깊은 신비와 오묘한 섭리에 오직 찬탄과 외경이 있을 따름이다. 푸른 하늘을 떠가는 흰 구름, 천인단애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노송의 위용, 영롱한 아침이슬과 자욱한 안개…… 어디 그뿐인가. 우리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는 모든 자연현상은 그야말로 조물주의 오묘한 섭리가 아닌 것이 없다.


수석을 보자. 산골짜기나 냇가에 흩어져 있을 때에는 흔해 빠진 돌덩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수석인의 빛나는 눈동자에 부딪치게 될 때에는 이미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다.

 

수석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찾아낸 순간 그것은 자연의 모든 신비와 섭리가 깃들어져 있는 한 상징적 존재가 된다. 어느 과학자는 한 알의 모래알 속에서 우주의 신비를 엿본다고 하였다. 수석인이야말로 한 개의 돌을 통해 자연과의 끝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굳이 낯선 산천과 고장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만남에 가슴이 설레는 것은 미지의 돌이 함축하고 있는 자연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거의 외면하고 있는 차가운 돌덩어리에 깊은 애정을 갖게 되는 것일까? 물론 그것은 앞의 말처럼 자연과의 대화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그처럼 자연을 향해 끌리게 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 자신이 바로 저 수석처럼 자연의 한 분신이기 때문은 아닐까? 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그러니까 어차피 우리의 핏줄 속에는 자연의 신비가 숨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번잡한 일상에 쫓기느라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바람이 흐르는 것처럼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자유이며 동시에 멋이다. 그리하여 멋은 자유이자 풍류인 것이다. 최치원이 한민족의 기본정신을 바람에 나부끼는 선 곧 풍류라 한 것은 사람이 자연의 품에 안겨 그 일부가 됨을 뜻한다. 자연은 자유롭게 ‘멋’에 따라 흐르며 인간도 아울러 그 ‘멋’을 즐기며 산다.

 

한국인이 즐기는 노래에는 흔들림, 즉 시김새가 있다. 가야금을 연주할 때 한곳을 왼쪽 손가락으로 누르면서 튕길 때고 시김새가 생긴다. 애절하게 같은 음계가 끊어질 듯 하면서도 길게 흔들리며 이어진다.  김인후의 <自然歌>에서 부르기를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 절로 물 절로

이 속에 절로 자란 몸

절로 늙어 가리라.


돌과 나누는 대화 속의 밀어

emb00000ef40001돌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데 형용하기 어려운 생명적인 것이 가슴에 와 닿는다.

 

또한 자신도 모르게 흥취를 얻으며 위안을 받게 된다. 즉 이러한 것들은 수석이 나에게 건네주는 말씀인 것이다. 한 수석을 오래 바라보았을 때 武陵桃源과 같은 평화로운 선경이 떠오른다면 그것은 수석이 나에게 들려주는 소리 없는 말이다.

 

수석은 굳고 움직이지 않으며 감각이 없지만 수석이 어떤 영상을 안겨줄 때 그 수석은 몸짓으로 나에게 감흥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꽃무늬가 새겨진 수석에서 그윽한 향기를 맡고 있다고 생각하면 바로 그 향기가 수석이 내게 주는 말인 것이다.

 

수석을 생명이 있는 것으로 인식할 때 수석이 발산하는 깊은 언어를 체험하게 된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수석에게 이야기를 하게 된다.

 

내가 수석을 향하여 언어를 보낼 때 그 내용은 어떤 것일까? 하나의 산수석을 보고 있다고 하자. 산봉우리가 솟은 산에 폭포와 벼랑과 바위를 실제의 것으로 느낀다면 그 산수석에서 노니는 기분이 들게 될 것이다. 골짜기를 타고 벼랑을 오르다가 맑은 계류에서 목욕도 한다. 이 곳이 바로 신선들만이 노닐던 심산유곡이구나. 이러한 생각을 그 산수석에 보낼 때 이것이 내가 수석에게 보내는 언어가 되는 것이다.

 

또 기도하는 모습의 형상석을 바라볼 때 그 모습은 나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 같은 감사의 마음이 든다. 웅크리고 앉아 고통스러워 하는 듯한 형상석을 보면 나의 번뇌를 깨우치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생각들이 바로 수석에게 보내는 나의 언어가 된다. 동시에 수석이 나에게 건네주는 언어이기도 하다.


수석과의 대화란 미적 체험을 통한 상상세계이다. 상상의 날개를 펼칠 줄 모르는 수석감상은 성립되지 않는다. 마음속에 단비가 축축하게 내리고 있을 때 상상은 아름답게 펼쳐진다. 마음속에 가뭄이 들어 있으면 가뭄에 곡식이 자라지 못하듯 수석감상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수석과의 대화가 결핍되는 것이다.

 

가뭄이 들면 단비가 필요하듯 메마른 정서에 영양제가 필요하다. 이 영양제란 인간을 가장 더럽히는 것들을 없애는 것이다. 적어도 수석을 바라보는 순간만이라도 조바심, 남을 미워하는 생각, 탐욕에 빠져있는 자신을 잊어야 한다. 그러면 스스로의 정서가 안정된다. 고요해져가는 마음속에서 자유로운 상상의 날개가 힘차게 펄럭이게 된다.

 

 

자연에 살아있는 돌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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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겹 한 겹 겹치고 또 겹친 층의 절묘함이 이 돌의 감상포인트이다. 층층이 파여 들어간 바위의 모습에서 萬古風霜의 아픈 자국을 읽게 해준다.

유구한 세월 비바람이 약한 부위는 깎아져 파이고 단단한 경질 부분만 남겨 놓아 입체감 있는 층층 바위가 되었다. 이런 형태의 바위가 보여주는 이색적인 경정이 수석미 탐구에 많은 보탬이 되고 있다. 바위의 쓰린 표정에서 인고의 아픔과 강한 의지를 배우게 한다. 기묘하게 파여 들어간 홈과 양각으로 돌출한 테두리가 어울려 이 돌을 고아한 고태미로 감싸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은 어디에 있는가? 그 자연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은 생명의 본체로 자연의 상태일 때 생명력은 용솟음 친다. 생명은 자연에서 나오는 것이요 자연은 곧 진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의 진리에 순응하려 하지 않고 급변하는 도시의 법칙에 따르려고 한다. 수석은 법칙을 위하여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감상하기 위하여 자연을 파악하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생활 참된 삶이란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이 진리는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이요 생명이 있는 삶을 의미한다. 생명이 없음은 생의 가치 있는 목표가 없음을 뜻한다. 목표가 없는 인간은 식물인간과 다를 것이 없다.

 

망망대해 위에 뜬 배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른다면 그 배는 표류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른다면 이것은 바로 자기상실인 것이다.

인생이 도시화된 문명만을 따른다면 얼마나 큰 자기상실인가. 그러한 가운데 자각 있는 사람들은 도시에서 자연을 최대한 가깝게 느끼려는 노력으로 수석을 방 안에 가져다 놓는다. 이것은 생명력 있는 삶을 영위하며 생명의 본체에 도달하고자 하는 애석정신이다.

 

수석을 왜 원하는가 묻는다면 수석을 소유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연을 곁에 두고 싶어서라 하는 것이 맞는 답이 될 것이다. 인간은 원래 자연이었다. 인간이 자연의 상태일 때 자유인 것이다. 인간은 자유이고자 한다. 자유는 생존이 아니라 삶의 확대인 것이다. 그래서 큰 삶을 갖고 싶어 자연과 가까이 하려고 한다.

 

인간이 아름다운 마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하는 행위를 예술이라고 한다. ‘예술은 인간을 고양(高揚)시키는 것이다.’라고 니체가 말했었다. 예술이 인간의 인생문제라면 자연은 인간본성의 문제이다. 미를 추구하는 행위가 예술이라면 무위는 바로 자연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자연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의지이다.

 

그렇다면 수석에 대한 본질을 살펴보자. 옛말에 ‘시는 형태가 없는 그림이요, 그림은 형태가 있는 시다.’라는 말이 있지만 수석은 형태가 있는 시요, 형태가 있는 그림이다. 수석을 자연의 마음으로 보지 않는다면 이는 돌멩이에 불과하다. 수석을 돈으로 보고 과시용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수석인의 욕심을 채우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수석은 보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각을 하게 됨으로써 진정한 수석을 느끼게 된다. 자각이란 나와 내가 별개로 세계를 동시에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숲 속을 보고 지나온 것은 비현실이요 숲 속을 나온 후의 자각한 상태가 현실인 것이다. 수석에서 현실감이 더해간다 함은 두뇌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에 의한 느낌으로 자각하는 것이다.

 

수석은 연륜의 시차나 능력에 의한 가치에 의존하지 않는다. 무수한 감각이 자아에 부딪침으로 인하여 자각에 의해 정신 내면의 활로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내면에서 충족해 오는 현실감, 아름다움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귀중한 현실감을 나의 것으로 해야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자각이라는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 그 자각의 세계로 수석을 펼쳐감으로써 보다 깊은 수석관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돌에서 자연미를

수석은 자연미를 찾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자연과 더불어 얻은 체험, 예술적 소산물에서 익힌 심미안, 인생과 자연에 대한 궁극적 답을 찾는 철학적 사고, 종교적 사유 등을 통해 하나의 돌에서 진선미(眞善美)를 찾아 완상하는 문화이다.

 

 

또한 수석은 동양적 풍류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개념을 크게 엮어볼 수 있다. 동양적 풍류정신에 따른 수석은 자연에 대한 외경과 애정으로 돌을 정관(靜觀)하여 애석도(愛石道)를 닦아 나가는 것이다. 이를 미적 관점에서 보면 수석은 자연미를 발견하는 발견의 미학이다. 이에 비하여 조각이나 그림 등 다른 예술행위는 창작의 미학이다. 따라서 수석미에는 작위성이 엄격히 배제되는 무위의 세계이다.


우리가 돌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자연을 사랑한다는 것은 미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미를 추구한다는 것은 정신성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정신성은 곧 자아실현을 추구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애석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미를 도외시한 수석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명예를 탐하지 않고 오직 작품에만 전념하듯 명품석을 향한 석인(石人)의 집념 또한 그에 못지않다. 자신이 선택한 수석에 대한 완벽한 몰입과 애정. 그것은 순수한 열정과 사랑의 모습이다.

 

돌에 이끌린다는 것은 진리에 다가서라는 자연의 손짓이다. 수석에 심취한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알려주려는 하늘의 눈짓이다. 바닷돌은 온 몸을 던져 빚어내는 천연의 몸짓이며, 은근하게 선(禪)을 제시하는 미명의 화두이다. 맑은 물에 달빛이 내려앉고 높은 산 아래 운해가 깔리듯이 청정하고 고요한 정신 속에 지혜의 샘이 솟아난다.


자연미의 발견과 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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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노하여 천둥소리 귀를 찢고 번갯불 번쩍 튀어 눈을 멀게 하여도 아랑곳 하지 않는 바위…… 그 부동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는 億劫을 두고 움직일 줄 모르며 앞으로도 영원하리라.

 

萬古風霜 오래오래 겪어온 태고의 발자취가 눈에 역력히 비친다. 비바람 찬서리에 그 얼마나 시달리며 깎이고 찢어졌기에 굵은 골이 깊이 파여 온 몸을 휘감았으랴. 세월이 할퀸 자국이 온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지만 그 불굴의 의지는 굳건하여 만약 다시 천지가 개벽한다 하더라도 전혀 놀라지도 움직이지도 않을 늠름하고 의연한 자세이다.

 

수석은 예술적 성향과 품격이 있는 취미이고, 여유와 멋을 탐구하는 풍류이다. 요컨대 수석은 자연석을 주제로 한 독특한 분야를 확보한 고상한 취미와 풍류의 생활문화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석의 본래 취지는 자연미의 발견과 찬상(讚賞)이고 자연성의 감지와 체득이다. 이를 몇 가지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설명하겠다.


첫째, 자연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신비에 대한 희열이다. 예술적인 자연미뿐만 아니라 숭고미, 경외미 등 다양한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것이다. 체험하는 미감의 보편성이 클수록 좋은 수석이 된다.

 

둘째, 자연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인간 심성의 갈망 해소이다. 우리는 자연상태를 그리워한다. 그것은 자유와 행복의 제약이 없는 향수(享受)상태이다. 원시 자연의 상태이며 이는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힘들기에 그 갈망은 상존한다. 수석을 통해 자연의 맛을 보자는 것이다.

 

셋째, 자연 내면과의 소통이다. 혼이 있는 개채로 수석의 내적 진실의 의미가 우리의 상상과 직관을 통해 통하는 것이다. 수석의 독보적 권위는 시간성 속의 역사에 있다. 내면과 역사를 이해하게 될 때 수석과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넷째, 저연과의 원융(圓融)적 일체감에 의한 순수, 겸허, 포용 인내 같은 덕성의 체득이다. 자연으로서의 인간은 선한 것이다. 자연성을 잃거나 훼손당한 우리가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선해지려는 것이다. 자연으로서의 수석은 섭리로 이루어진 엄숙한 자연성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를 경건하게 하는 점이다. 선과 경건이 바탕이 되어 바람직한 덕성이 이루어진다.


위의 이런 것들을 수석의 장르적 본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수석의 감상은 심미적이고 개념적인 기준에 의해서만 하는 것보다는 감응적이고 관조적인 자세로 자연미와 자연성을 감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수석은 조물주의 작품

수석은 격상된 대상물이나 형태를 말하는데 이러한 것은 감상자의 내적 깊이만큼이나 감상도의 깊이가 차이난다. 다시 말하면 수석에는 매혹되는 정도와 판단하는 마음이 작용하기 때문에 감상자에 따라 다른 감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의 장공(匠工)은 양각, 음각, 투(透), 조(調)로 수석감을 빚고 만들어진 형태에 색을 넣어 수석이라는 작품을 완성한다. 이렇게 형태를 만들고 색을 칠하는 것은 그 순서를 엄격하게 지켜야만 좋은 수석으로 완성할 수 있다. 수석은 조물주의 작품이지만 인간이 소유할 때 비로소 수석으로 다시 탄생한다.

 

수석의 긴 세월감은 인간이 모두 읽을 수 없는 무한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셈할 수 있는 마지막 단위인 수량수(數量壽)가 수석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조물주의 능력이나 재능은 심오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조물주의 뜻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수석에 내재된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조물주의 조형물을 탐석, 소장, 감상이라는 과정을 통해 음미한다. 애석생활의 첫째 조건인 탐석은 좋은 돌을 가질 수 있는 기회이다. 탐석을 통해 산지적응과 수석감의 특징을 알게 된다. 두 번째 과정인 소장은 단어 그대로 소유하는 것인데 비슷한 산지에서 비슷한 형태의 돌을 가졌을 때 좋은 돌을 가려낼 수 있는 판단력을 길러준다.

 

그 다음 단계는 감상이다.

특히 수석 전시장에서 다양하게 일어나는데 이곳에서 여러 사람의 선택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수석을 감상할 때에는 모든 체험과 미의 감각이 발동한다.

이렇게 돌만이 가진 미가 우리에게 탐석, 소장, 감상의 단계로 접근해 오는 것은 그것을 재화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값어치로 보기 때문이다. 즉, 밝고 투명한 시선과 정신의 잠재력으로 수석의 아름다움을 만나야만 수석의 깊은 신비를 체득할 수 있다.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지 않는 애석생활만이 명품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다.

 

이렇게 안목이 깊고 풍부한 수석인은 심미안이 발동되어 명품의 선별력이 아주 뛰어나다. 신의 심오한 뜻을 조금이나마 알아차리면 이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일 것이다. 경험이 많고 수석에 대한 이론이 체계적인 수석인의 안목은 수석 속에 내재된 의미를 도출하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

 

수석에서 미가 느껴지면 말을 잊고 혼을 빼앗겨 석상처럼 굳어버릴 수도 있다. 그 진한 전율은 미의 대상에서만 발휘되는 감탄사이다. 이러한 기쁨을 인간의 언어로는 다 표현하지 못한다.

이처럼 감탄의 대상인 수석에서 안목을 키우는데 첫째 조건은 자주 접하는 것이다. 전시회 관람과 탐석, 석우(石友) 방문 등을 통하여 그 안목이 자연적으로 높아질 때는 돌이 연출되어 있지 않아도 돌의 감상도가 머리 속에 그려지게 된다.


 

수석의 정의와 그에 따른 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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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형체의 구성이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잘 정리된 빼어난 돌이다. 돌 전체에서 풍기는 현묘한 형태가 추상예술미의 극치를 발견하고 있다. 한 층 한 층 탑 쌓아 올라가듯 멋지게 빚어 올라간 층마다의 깊은 파임에서 인고의 아픈 세월을 하나하나 읽을 수 있다.

 

 

수백 년 묵은 枯死木의 연륜 같이 표피의 수많은 굴곡이 오랜 세월감을 느끼게 해준다. 깊숙이 파여진 주름의 크고 작은 골에서 노태 어린 고태미가 운치 있게 풍겨오고 전체적으로 잘 조화된 균형미도 볼만하다. 앞으로 쏟아질 듯 천야만야 아찔하게 솟은 벼랑에서 오싹함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정의란 어떤 개념을 확정하여 명백하게 밝힌 뜻을 말한다. 그래서 이념이나 사물에 대한 확정적 정의가 설정된 것이 없다면 통일성을 찾지 못하며 개념의 질서마저 무너지고 만다.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다. 사물에 대한 각각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곧 작은 의미로 정의가 될 수도 있다.

수석의 정의를 내리면 ‘적당한 크기의 한 개 자연석을 대상으로 그 생김새나 풍정에서 산수의 시취(詩趣)를 얻거나 혹은 천연이 빚은 아름다움을 예술적 감흥의 세계로 승화시켜 즐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수석이란 어의(語義)는 산수미를 찬양한 것으로 어구는 먼 옛날부터 문인들의 시어로 불려오며 고유명사가 되어 전해진 것이다. 이 지구상의 모든 돌들은 석수만년(石壽萬年)이란 뜻에서 수석(壽石)이라 하겠다. 하지만 우리가 애완할 수 있는 산수경정석(山水景情石)은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선인들은 ‘일생일석(一生一石)’ 혹은 ‘천하명석(天下名石)은 천재지보(千載之寶)’ 또는 ‘수석은 무가지보(無價之寶)’라 하지 않았는가 생각해본다.

 

「치문(緇門)」 <근학(勤學)> 편(篇)에


돌을 보면 그 견고함을,

물을 보면 그 맑음을,

솔을 보면 그 곧음을,

달을 보면 그 밝음을 생각하라.


라 했다. 자연은 예부터 우리의 벗이요 스승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수석의 멋은 태고를 품은 채 바람에 깎이고 물에 씻긴 의연한 자세에 있다. 세월이 응고한 수석 하나를 문갑 위에 얹어 놓고 태고의 피부를 어루만지며 우주를 관조하던 고금의 풍류는 신선의 경지이다. 그러나 수석은 자랑도 말도 없다.

 

얼룩진 색채보다 검은 먹의 예술에 더 집착했던 동양의 선비들이 마지막으로 귀의할 곳은 결국 돌밖에 없었다. 서양화는 여자의 나체에서 출발하고 동양화는 돌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오브제 예술이라는 것을 탄생시키기까지 우여곡절을 거쳐 온 서양이 동양과 만나는 곳이 바로 돌이다.

수석은 언제나 시(詩)? 서(書)? 화(畵)의 중요한 소재였다. 선인들은 수석의 묵묵하고 불변함을 갖추었으며 다정다감한 기품을 사랑했다. 그리하여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깊은 선(禪)의 경지에 들기도 하면서 문방오우이자 제 오군자로 애완했다.


명대의 서화 대가인 문징명의 제발문 중에 이런 글이 있다.


옛날에 손바닥만한 화폭에도 천리의 넓이를 볼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이 화가의 현묘한 비법이다. 지금은 주먹만한 돌의 경치에도 한 천지의 풍치가 전개되었고 천봉만학의 형태를 갖추었으니 이를 관상하며 스스로 무아의 경지에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겸손하게 단정을 피했지만 이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무아경을 터득하도록 하려는 친절한 배려가 아닐까 생각된다. 임어당은 돌멩이 하나, 나무 한 그루도 대자연을 호흡하는 동양의 전통을 예찬했다. 그러면서 거대하고 억세며 부드럽기도 한 영생불멸의 상징인 돌에 대한 사랑을 권하고 있다.


돌의 세 가지 아름다움 탐색

emb00000ef40005수석이 갖추어야 할 조건은 색, 선, 피부의 아름다움이다. 이들이 적절히 조화되어 나타나는 신비스러움 또한 내포되어 있어야 한다.


수석의 아름다움을 분류해 보면 회화미, 조형미, 심상미로 구분할 수 있다. 색의 아름다움, 선의 아름다움, 피부의 아름다움이 갖추어진 신비스러움이 내포되어 있어야 한다.

 

회화미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돌이 지닌 색으로 나타남과 요철로 이룩된 부분이 있다. 채색이나 명암으로 나타나 무언가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로 와서 닿는다.

 

산수화, 화조도, 인물화들의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문자나 사군자의 기법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떤 색깔로 이룩되었거나 요철문양으로 형성되어도 자연의 조화이므로 감상 자체는 세속의 번뇌를 지워나갈 수 있다. 수석으로 선택된 돌 속에 내포된 색은 현재까지 오색이었다.

 

무지개의 자연색과 프리즘을 통과시킨 빛은 일곱 가지 색깔이다. 먼셀의 색척(色尺)을 현대 과학기술로 혼합시키면 수백 가지 색상으로 배합된다. 그러나 수석적인 회화미란 돌 속에 새겨져 있는 문양이나 무늬를 찾아보는 것으로, 자연적인 이룸이다. 돌에 새겨진 그림이 아무리 뛰어나도 소장자의 내면세계를 그린 그림이 아니면 안 된다.


조형미란 물체의 형태를 찾아보는 것으로 입체적인 아름다움을 말한다. 외형을 이루는 조건을 수석에서는 언제나 선의 아름다움이 좌우한다. 다시 말하면 굴곡을 이루는 변화가 된다. 수석감상의 즐거움은 풍류로 형상을 통해 산수경이나 삼라만상의 형태를 느껴가는 아름다움의 감상이다.

 

조형미는 시각 속에 와 닿는 신비로움으로 신공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이다.

조물주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은 부족한 부분을 깨뜨려 따로 돌을 만들지 않는다. 아쉬움은 있지만 수석감상은 언제나 이룩된 형태 그대로 감상해야 한다. 신공의 뜻을 거역하지 않음이 애석심이다.


형태미를 감상하는 데는 삼면법을 적용한다. 조형요소에는 안정감이 수반되어야 한다. 삼면법이란 단어는 미술용어에서 접목된 언어이지만 수석에 적용시킬 때는 다른 뜻으로 통용된다. 미술에서는 앞면, 뒷면, 밑면을 일컫는다.

자연물인 한 덩이 돌이 가진 형태에서 돌이 지닌 내면의 세계를 음미하며 숨겨진 부분을 찾아내어 감상하는 것이 조형미 감상이다. 수석의 외형은 수마에 의함이 많고 땅 속에서 풍화작용으로 이룩됨을 원하지만 인공이 가미됨은 배제한다.


눈앞에 나타난 돌을 만날 때 큰 감회를 느끼게 된다. 신공이 이룩해 놓은 자태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러한 것을 심상미라 한다. 감상자의 심상적 작용이 무한으로 이어진다. 때로 추상석이라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추상은 고도의 습작을 통해 이루어낸 정신적 창작으로 처음부터 추상이 이룩됨은 없다. 미루어 생각하는 추상과는 다른 뜻이다.


이렇게 세 가지 미가 겸비된 수석감이 애석인의 눈과 마주쳐 마음속으로 전달되면 수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이야기의 길고 짧음은 소유자의 안목의 차이에 따라 결정된다.

 

심상석의 요인은 수마가 많은 돌일수록 전달이 많다. 선의 생략이 극대화되기도 한다. 수석이 지닌 색의 아름다움은 자연이 갖고 있는 미다. 조형적인 아름다움은 조각과의 대비가 아니고 체험으로 얻어지는 정신적인 작용이다.

 

 

수마에 의한 돌을 보면 표피가 나타내는 부드러움과 깨끗함은 즐거움을 안겨준다. 세월이 축적한 이들은 인간의 체험이 미루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다. 토중석과 산돌은 형태의 신비는 많으나 수마석보다 돌의 표피는 물기를 오래 간직한다.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이 연결되어 소유욕으로 변하면 자연의 일부를 실내로 옮겨 감상의 대상으로 만든다. 때론 장식적인 효과도 있게 된다.

 

사람들은 돌을 통한 상상의 발휘와 순화로 시를 쓰게 되고 그림도 그리게 된다. 다시 말하면 돌이 예술적인 모델로 격상된 것이다. 이런 진실된 마음을 발휘하게 하는 수석의 평가 기준이나 잣대가 아직 확립되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감상 기준이 다 다르다.

 

수석은 체험의 이론이므로 적용이나 감상도가 다르지만 전시장에서나 남 앞에 드러내면 공감성은 일품석으로 모아진다. 그러나 개개인의 동겨의 대상이나 원하는 형태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이는 자연물을 통해 향수 같은 동경의 마음이 모아지는 것은 수석의 단순함만은 아니다.


회화미, 조형미, 심상미 어느 쪽을 감상하더라도 수석감이 내포하고 있는 요건 중 색의 아름다움, 선의 아름다움, 피부의 아름다움이 수반되어야 한다.

수석은 노력에 의해 소유하고 감상하는 것이다. 이들은 숫자의 많고 적음에 관계하지 않고 삶의 부산물이 아닌 기호품인 것이다. 돌을 가진다는 것은 자연의 비밀을 인간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정신을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최상의 취미인 것이다.


작은 돌(小品石)의 오묘한 축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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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이 자연의 축경이라면 소품석도 절대적으로 축경의 세계이다. 이 소품석을 옛사람들은 도포 소매 속에 넣고 다닌다고 신리석(神裏石)이라 불렀다. 또 한줌밖에 되지 않는다고 일악석(一握石) 또는 장석(掌石)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소품석은 작으면서도 가볍지 않고 품위가 있어야 하며 천연의 돌이 풍기는 기상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일권천인(一拳千人) 천리일순(千里一瞬)’이라는 말은 손바닥 안에 잡히는 돌 하나에도 유구한 역사를 지닌 대자연이 접해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추구하는 수석미는 자연의 축경미이며 소품석은 이 축경미의 진수라고 본다.

 

수석의 전통은 축경미의 세계이다. 이 축경의 경지는 동양정신의 한 특질로 우리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산수화에서 웅장한 경관을 작은 화선지 안에 다 담아 그리는 것, 이것이 축경의 의미인 것이다. 작은 종이 위에 온갖 산수의 정경이 그려진 것을 바라보는 기쁨. 이것이 축경미의 궁극적인 발현이다.

 

소품석의 오묘하고 황홀한 경지를 터득하려면 수석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꾸어 말하면 소품석의 가치를 체득함으로써 수석의 일가견을 가진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큰 경치를 작은 곳에 그리는 것이 축경미의 **이라면, 작은 것에서 커다란 경치를 감상한다는 것은 축경미의 절정에 이르는 것이다. 수석은 자연의 섭리로 형성되어 작은 돌에서 광활하고 변화무쌍한 산수경을 작은 돌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깊고 깊은 골짜기, 험준한 산악, 절벽, 폭포, 호수 등의 온갖 자연 경치를 한 개의 돌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자연계의 변화하는 현상이라든가 온갖 생물의 현상을 작은 돌에서 찾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축경미의 견지에서 감상할 때 수석의 진실과 가치가 나타나는 것이다.

 

축경미의 세계는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바라보고 감상하는 것으로 더욱 작은 것에서 더 큰 것을 볼 수 있다면 더 가치 있는 것이 된다. 주먹만한 돌에 설악산의 경개가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축경의 절정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상고해 볼 때 소품석일수록 축경미의 최고 절정을 더욱 돋보이는 고귀한 가치를 나타낸다. 소품석을 보다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는 주장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수석의 축경미에 대한 본래의 뜻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소품석을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작은 돌이나 큰 돌은 제각기 독특한 멋이 있는 것인데 작은 돌의 별천지를 몰라서는 안 될 일이다.


소품석을 탐석할 때에는 축경미를 갖춘 수석에만 몰두하지 말고 추상에도 관심을 가지면 그 소득이 더 높을 것이다. 이 추상이라는 것을 수석의 경지에서 달리 말한다면 예술미를 갖춘 수석이라 말하고 싶다.

 

자연 현상의 무엇인가가 축소되어 닮지 않은 것으로 귀엽다든가 線美가 좋다든가, 변화미가 있다든가 하는 점에 장점을 찾아내면 좋을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수석의 기본요소인 짙은 색깔과 단단한 석질을 무시하면 안 된다. 우선 예술미적인 견지에서 소품들을 탐석하여 간직했다가 어느 날 문득 그 추상성에서 축경미를 발견하는 예도 있다.


소품석의 여러 장점들 가운데 두드러지는 하나는 결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명석일지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점이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어떤 수석이든 완벽한 것은 없다. 완벽하다는 수석은 오히려 의심스러운 것이다.

 

수석의 불완전함이 있기 때문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며, 완벽의 추구와 이상경을 느낄 수 있다. 불완전한 것을 바라보고 완벽한 모습에 꿈을 키운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때의 꿈은 완벽으로 향하는 요람이다.

 

커다란 돌일수록 불균형하고 불완전한 결함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보여 몹시 눈에 거슬리게 된다. 하지만 소품일 때에 그것이 너무 작은 돌이어서 혹시 결함을 안고 있더라도 잘 보이지 않는다. 작은 것에서의 아주 작은 결함이란 어느 정도 완벽성에의 흡족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큰 돌에서의 결함이 크게 나타나 보이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이것이 소품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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