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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 산수경석 보는 方法 (2)

高山 | 2009.08.12 14:52 | 공감 0 | 비공감 0

수석(壽石)의 이상(理想)을 찾는 비법(秘法)

첩첩이 겹쳐진 깊고 큰 골짜기에서 낭랑한 물소리가 깊은 산간에 메아리치다. 산맥의 기운이 살아 넘치는 듯 꿈틀대며 약동 하고 있다.

웅장하게 치솟은 주봉을 정점으로 좌우에 여러 갈래로 흘러내린 골짜기가 심산곡간(深山谷間)을 연상케 한다. 좌측 산자락의 마무리가 섬세하게 잘되어 세련미도 보인다. 밑자리의 드나듦이 조화와 변화로 멋스럽게 배들이를 이루어 백파(白波)찰싹이는 파도 소리로 들릴 것 같다.


산수경정석은 자연미 감상이라는 관점에서는 가장 정통적(正統的)인 것으로 수석의 이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수석을 보는 방법의 기본이 되는 요소를 다분히 갖고 있기 때문에 수석인 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 장르가 되고 있다. 수석이 자연미를 추구하고 사랑하는 행위인 이상 자연미의 주축이라고도 할 산수의 경정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자연미- 곧 산수미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실경(實景)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다. 흔히들 산수경정석이 실경적인 것, 혹은 실경을 축소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면 수석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를 갖는 이도 있다. 물론 실경적인 것에는 영원히 수석인의 마음을 끄는 노스탈지어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들이 수석에서 발견하고 추구하려는 산수경의 세계는 더 넓은 것이다.

따라서 상상으로서의 풍경미, 이상으로서의 경정미도 함께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산수경정석을 형태상으로 본다면

첫째 여러 가지 경정을 고루 갖춘 것과 둘째 단순한 경정이면서도 그 경정이 아주 뛰어난 것을 들 수 있다. 어느 쪽이 좋다 나쁘다고 우열을 가리기는 매우 어렵다.


첫째의 것에 너무 집착하면 완전한 것, 희귀한 것만 찾게 되어 수석취미를 진귀품 기호로 이끌기 쉽다. 반대로 단순한 것에만 주안을 두게 되면 개성이나 경정이 부족한 돌을 함부로 수석 취급하는 풍조가 야기되기 쉽다.

산수경정석을 형태상으로만 볼 때는 전체적으로 잘 조화된 것과 결점은 있으나 어느 일부분에 그 결점을 커버할 만한 빼어난 특색이 있는 것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그 어느 쪽이건 간에 경정이 통일되지 않고 불안전한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반드시 조화가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게다가 경정에 약동감이 있어야 한다. 그림에 「기운생동(氣韻生動)」이란 말이 있듯이 수석에도 기품이 없거나 약동감이 없어서는 미를 느낄 수가 없다. 또한 산수경정석은 하나의 자연석을 통해서 대자연의 묘취를 관상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가끔 그릇 이해되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자연스러움」이란 「이상적인 자연미」를 말하는 것이지 자연 그대로인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수석에서 추구하려는 아름다움은 온갖 자연의 경관 중에서 좋은데 만을 조성, 형성한 즉 이상화된 자연이다. 「자연을 이상화해서 자연 이상으로 자연스러운 자연」을 보려는 것이다. 이상화된 자연스러움이 우리들의 심미안에 순순히 받아들여질 때 납득할 수 있는 형태와 경정이 된다.

돌을 수석으로 보는 방법이 따로 있다. 그것은 구상적이거나 사실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수반이나 혹은 좌대에 한 개 자연석을 얹는 것만으로 대자연을 상상시켜서 그 속에 융합시키려는 것이다.

천태만상(天態萬象)의 기경(奇景)을 신비롭게 간직하고 펼쳐져 누워있다.

골짜기마다 적절한 사이를 두고 운치 있게 간격을 맞추어 약동감을 느낀다. 산줄기가 밀려오는 물결처럼 넘실대는 듯하여 유려(流麗)한 선율의 리듬감도 넘친다. 심산유곡(深山幽谷) 깊고 깊은 골짜기에서 쩡쩡한 물소리가 요란스레 울릴 것 같고 산새도 목청 돋우어 산울림 할 것 같다.


말하자면 비록 사실적이 아니더라도 사의적(寫意的)으로 한 개 자연석에서 산수의 경정을 연산하고 즐기려는 것이다. 따라서 수석은 자연미의 축경인 동시에 상징이자 암시인 것이다.

또 이상인 것이다. 때문에 수석을 보는 방법의 첫째 포인트는 한정 없는 연상으로 시정(詩情)을 즐기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한다면 연상을 유발하지 않는 돌은 좋은 수석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형태가 갖추어진 것만이 좋다고만 말 할 수는 없다.


이 점이 수석의 미묘함이다. 물론 몽돌이어서야 안 되겠지만 동양적인 여백의 미. 어딘지 모르게 부족한 점이 있어서 오히려 연상의 묘함이나 상상하는 재미가 있는 수석도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수석엔 자연석 그대로의 아치(雅致)를 존중하는 경향도 있다.


즉 석면에 새겨진 돌갗의 상태라든가 무늬 혹은 색상 따위를 완상하는 것 역시 수석을 즐기는 방법의 하나인 것이다.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은 홈이나 골, 곰보 상태가 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갖가지 진귀한 무늬를 보이거나 아주 빼어나고 미묘한 색채가 되어 드러난다. 하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꾸밈없는 자연의 묘취(妙趣)를 즐기는 것으로 그쳐야 할 것이다.


아스라이 펼쳐지는 원산석(遠山石)의 시정(詩情)

단아하고 의젓한 산용을 갖춘 雙峰遠山石으로, 멀리 바라볼수록 마음도 조용히 가라앉혀 주는 것 같은 조용한 산이다. 좌우를 부드럽게 천천히 흘러내린 능선에서 원경의 線美를 아름답게 간직할 수 있다. 조용히 솟아오른 두 봉우리 위에 하늘 높푸르고 구름마저 떠다닌다면 마음도 저절로 청명해 지리라. 산기슭 푸른 골짜기에는 평화로운 산골 마을들이 옹기종이 사이좋게 정을 담고 살 것 같다.

거리낌 없이 쭉 빠져 흐르는 산맥의 선의 아름다움은 원산석의 기본으로 최고의 경지라 할 것이다.

쌍봉이나 연봉일지라도 요는 그의 조화의 경치가 완전하게 용해되어 있으면 이상적인 형이다. 대체적으로 주봉이 중앙에 위치한 것으로 명품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좌우 어디론가 흐름이 있어야 한다. 주봉만이 높게 흘립(屹立)된 것은 표준에 벗어나면서도 촛대바위 같은 개성으로 경관을 깊게 해주는 것도 있다.

원산의 산자락 경치에 있어서 산자락이 뻗다가 뚝 끊어진 것은 좋지 않다. 실경에는 그런 경이 있다고 해도 이상경을 추구하는 것에는 좋은 재료가 되지 못한다. 또한 전경(全景)과 국부(局部)의 관계에 있어서 전산(全山)에서의 호수 또한 굴곡과 잔주름 등 예(藝)가 많으므로 국부의 이상을 알며 뒤에 총합적인 미와 방불(彷佛)한 정감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산세의 앞면과 뒷면이 서로 절벽이 되어서도 안 되며 뒷면의 살(肉)을 뒷받침한 조화가 이루어져야한다. 좌우 역시 주봉을 기조로 하여 우측에 약간의 맥의 뻗음이 있으면 좌측에도 맥의 흐름이 길게 뻗어 있어야 한다.

돌의 밑자리가 안정감이 없으면 산수석의 짜임새가 좋을 리가 없다. 몸 가까이에 있는 자연경치나 멀게 보이는 경치에 대한 깊은 관찰을 반복하는 미적인 단련과 배운 것을 익숙하게 익힘이 쌓이는 가운데 수석에 대한 바른 안목이 생기는 것이다.


이상이 원산석의 국부 및 근경의 원칙적인 것이지만 여기에 파생되는 석질의 조(粗)와 밀(密), 그 형의 양부(良否) 등이 상미(賞味)에 관계됨은 말할 것이 없다.

양석된 원산석을 수석의 흐름에 따라 수반에 맞추어 연출시키는 조건은 물을 뿜어주고 습(濕)과 건(乾)의 깊은 정취를 맛보는 것이라 하겠다. 이건은 원산형을 두고 수석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돌은 지(止)요 동(動)이라 했다. 정물(靜物)이면서도 선(線)의 율동이 살아있다는 말이다. 원산의 선은 거의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직선은 엄격을, 사선은 활동을, 횡선은 평안을 나타낸다.


단봉석(單峯石)의 경정을 진단으로 찾는 묘법


웅대하고 장엄한 산줄기가 중량감 있게 차분히 펼쳐져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수려함을 보여주어 그윽한 정취(情趣)가 은은히 감돈다.

중후하면서 장엄하게 솟아오른 봉우리는 영감(靈感)이 깃든 듯 신성(神聖)해 보인다. 웅장한 기품이 넘치는 산에서 근엄하고 후덕하던 가친(家親)을 연상케 하는 부정(父情)의 산이기도 하다. 무서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따뜻한 체온이 뜨겁게 전해져 오던 아버지의 끝이 없는 마음을 이제야 읽게 되는 것 같다. 이상적으로 조화된 미와 균형이 제대로 갖춘 산형이 일품으로 아름답다.



형태에 알맞은 경정이 무엇을 연상시켜 주는가를 알고 그 뜻을 읽어야 되겠다. 만약 그 돌이 산수의 경정(景情)을 보여주는 돌이라고 연상되면 이제부터 그 돌의 정체를 진단해야 한다.

그 돌의 형태가 산과 흡사하냐 아니면 바위모양이냐 드넓은 평원이냐 또 고향의 언덕 같은 토파냐 이런 식으로 우선 유형별 형태부터 분류하여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산형인 경우에는 이 산의 형태가 우뚝 솟은 단봉이냐 사이좋게 나란히 돌은 쌍봉이냐 태산준령을 방불케 하는 연봉이냐 등등 그런 다음 이제부터 산수미의 아름다움을 찾자면 그 산형의 결정적인 포인트가 어디에 있는가를 차근차근 진단을 내려야 한다.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캐듯이 따져보자

가령 單峰山形이라면 과연 산으로서 산다운 자연미가 내포되어 있는 가 전체적으로 군살 없는 야윈 산용으로 세련미가 있는가, 산봉우리는 알맞은 자리에 솟아 있는가,

높이나 생김새가 적절하게 균형이 잡혔는가,

산 능선의 흐름이 유려하게 유연성이 있는가,

산 뒤편이 절벽을 이루어 균형 맞지 않아 불안하지 않는가,

앞 쪽 기슭에 자연의 경관을 연상시킬만한 넓이가 있는가,

앞뒷면 폭이 잘 어울리는 비례로 펼쳐져있는가,

밑면의 자리가 반듯하여 안정감이 있는가,

좌우 기슭 끝 부분이 잘리지 않고 잘 마무리 되었는가,

활처럼 안으로 휘여 오목한 배 들이가 생겼는가,

돌의 크기는 수석감으로 적당한가,

단봉형 하나의 돌을 완전해체하여 진단하였다.

지금부터는 단봉형이 갖추어야 할 요소와 장점만을 골라 더 구체적으로 해부하면서 아름다운 돌의 결정적인 포인트를 찾아내는 작업을 시작해 보자.

단봉을 보는 기본에 삼면법(三面法)이란 게 있다.

삼면법을 알고 나면 어떤 형태의 돌이라도 분별해 볼 수 있는 게 된다. 이상적인 원산형이란 돌의 앞뒤, 상하가 균형 및 조화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전후가 1면이고 좌우가 1면이며 상하가 1면으로 이 3면이 이상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첫째, 돌의 좌우가 변화속의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

둘째, 앞뒤의 넓이, 즉 폭이 적절해야 한다.

셋째, 봉우리나 능선이 잘 생겼는데다 밑자리에 안정감이 있어야 한다.

높은 봉우리 위에 지나가던 뜬구름 한 자락 걸려있다면 선학(仙鶴) 한 쌍이 훨훨 내려와 어울려 춤을 출 것 같고, 深谷에서는 불로초를 찾는 사슴이 한가롭게 거니는 仙景을 연상케 하는 유현하고 아름다운 산이다. 하늘을 찌를 듯 충천(衝天)의 기세로 솟구쳐 오른 峰頭가 힘차고 기개가 당당하다. 작은 고추가 맵듯이 봉은 작지만 웅대하고 장엄한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봉우리에 힘찬 기맥이 뻗어있어 氣와 勢가 넘치기 때문이다. 天上天下唯我獨尊인 양 하늘을 찌를 듯, 송곳처럼 꼿꼿이 서서 부동의 자세로 이 땅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그 용자(勇姿)가 씩씩하다. 기운찬 맥박처럼 힘줄기가 상하좌우로 꼿꼿이 뻗어 있어 바위가 강력한 힘에 충만 되어 있을 것 같다.

 

먼저 앞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원산형 돌의 앞면에 적절한 넓이의 기슭이 있다면 뒷면에도 이에 상응하는 넓이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앞면이 보기 좋게 원산형을 이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뒷면이 깎아지는 듯 한 절벽모양이 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도 그렇게 생긴 산이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등고선(等高線)을 중심으로 해서 앞에 2의 넓이 즉 기슭이 있다면 뒤에 1의 넓이가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좌우의 밸런스도 중요하다. 한쪽에 봉우리가 솟아있다면 다른 한쪽으로는 길고 유연한 능선이 뻗어 있는 것이 이상적이다.

또 그 능선 끝 부분에 흘러내린 능선을 마무리 짓는 작은 봉우리라도 하나 솟아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봉우리와 능선의 대비도 단조롭지 않는 것이 좋다. 밸런스가 잡혀 있고 부자연스럽지 않아야 한다.


즉 변화속의 조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봉우리의 높이나 위치 역시 경정미에 큰 영향을 준다. 돌의 좌우 길이 1/4이나 1/3의 위치에 봉우리가 솟아있는 것이 좋다. 양쪽 끝 부분의 마무리도 잘되어 있어야 한다. 끝 부분이 부자연스럽게 끊겨 있어서는 곤란하다. 뻗어나간 능선이 자연스럽게 지표에 맞닿은 듯이 보이는 것이 으뜸이다.


또 끝 부분이 돌아버린 것은 환영받지 못한다.

그것은 양쪽 능선의 힘이 뒤로 달아나 버렸기 때문이다. 부감(俯瞰)해서 보면 양쪽 끝이 안으로 감싸듯이 하고 있는 것이 좋다.

상하의 관계도 중요하다. 봉우리나 능선이 잘 생겼으면 밑자리도 좋아야 한다. 그것은 안정감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앞뒤, 좌우가 좋고 봉우리나 능선이 잘 생겼다 하더라도 밑자리가 반듯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밑자리가 나쁘다면 돌이 서지도 앉지도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칼로 벤 듯이 반듯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모래를 깐 수반이나 혹은 좌대에 앉힐 수 있을 정도의 반듯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윗부분의 무게를 감당할만한 두께가 밑 부분에도 있어야 한다. 밑 부분에 적당한 두께가 없으면 돌전체가 안정감을 잃고 만다. 믿음직한 앉음새를 하고 있는 돌에서 우리는 안심과 안정감을 느낀다.

단봉형의 장점과 단점을 하나하나 해부하여 진찰을 맞추었다.


이제부터는 독자의 예리한 슬기와 향상된 심미안으로 수석미의 아름다움을 돌의 결정적인 포인트를 내 것으로 찾아 내 것으로 간직하여야 되겠다.


쌍봉형(雙峯形)의 아름다운 균형미

쌍봉형은 유연하게 솟아오른 주봉과 부봉과의 균형이 조화 있게 어울려야 한다. 봉마다의 힘의 대비도 맞아야 한다. 전체적으로 단아하고 유려한 곡선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봉우리가 두 개라고 해서 아무돌이나 쌍봉형 산수경석이라고 규정될 수는 없다.


여기에는 산수경석의 요건 상 몇 가지 주문이 따르는데, 그것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수석의 일반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돌의 강도와 색감, 그리고 물 씻김의 정도가 일정한 수준까지 도달해있지 않은 돌은 아무리 두 개의 봉우리가 멋진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고 해도 수석으로서는 B급 밖에 안 된다.


② 주봉(主峰)과 부봉(副峰)이 균형 있게 만들어져 있는 것이 좋다. 두 개의 봉우리가 같은 크기이거나 같은 모양이면 감흥은 반감된다. 또 주봉에 비해 부봉이 지나치게 크거나 작은 경우에도 자연스러운 맛이 줄어든다.


③ 좌우 능선의 흐름에 유연한 맛이 있어야 한다. 능선의 흐름이 단절되거나 갑자기 급경사를 이룬 것은 감상에 부담이 따르며 불안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이때 능선의 완급정도가 좌우대칭이 아니라 얼마간 대조적이라면 더욱 금상첨화일 것이다.

하늘에 닿을 듯 힘차게 솟구친 쌍봉의 웅장한 위용에서 빼어난 산수미의 극치를 맛본다. 곧게 솟아오른 봉우리의 기상이 산다운 기백을 보여주고, 나란히 마주보며 정겹게 서 있는 매혹적인 비경은 천하제일경이다. 준수하게 솟아오른 두 봉우리의 균형과 변화미가 출중하고 그 사이에 험

난하게 파여 들어간 골짜기의 가파른 능선들이 단애의 기암절벽을 잘 표 현하고 있다. 바위가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형성해 아찔한 스릴을 맛보게 한다. 직립한 암벽에 폭폭 파여 들어간 수많은 홈들이 무쌍한 돌갗의 변화와 활기를 가득 준다. 단순한 단애의 경정을 살리기 위해 양쪽으로 아름다운 두 봉 우리가 돋아나 기묘한 괴암의 멋을 풍겨주었다.

 

④ 두 개의 봉우리는 가급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골이 너무 깊거나 두 개의 봉우리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경우에는 자칫 물형이나 섬 형으로 보이기 쉽다.

⑤ 주봉과 부봉이 가급적 동질의 석질이어야 제격이다. 석질이 서로 다르면 이질감이 느껴지기 때문에 편안하게 감상되지 않는다.


⑥ 두 산봉우리에서 느껴지는 색감에 큰 차이가 없는 게 좋다. 주봉과 부봉이 지나치게 대조적인 색감을 가지고 있으면 이미지상의 혼란이 야기될 수 있고, 어떤 한 계절의 경관을 연상하는 데에도 애로가 따른다. 다만 원산이 근산 보다 약간 흐린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움을 배가시키는 요인이므로 예외로 친다.


⑦ 주봉과 부봉의 물 씻김 상태가 일정치 않아야 더욱 좋다. 원산보다는 근산이 좀 더 거칠고 변화가 있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⑧ 돌 전체가 매끈하게 다듬어진 것보다는 얼마간 변화가 있어야 좋다. 매끈한 돌은 편하고 부드럽게 느껴지지만, 산 속에 감춰져 있는 수목과 계곡, 바위 등을 연상하는데 장애를 준다.

 

민둥산은 산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 산이다. 이상에서 열거한 것 외에도 쌍봉형 경석의 요건은 얼마든지 더 있을 것이다. 소장자의 개성이나 미의식이 천차만별인 만큼 바람이나 주문도 세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까다롭고 세밀한 주문들은 모두 충족시켜주는 수석감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사실 자연은 인간의 무한한 욕심을 모두 만족시켜 주지 않는다. 또 조금 부족한대로, 어딘가 어색하고 불완전한 대로 포용하고 용납하며 어우러져 흘러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기도 하다.


쌍봉형 산수경석을 감상할 때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도 이런 포용과 용납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우리는 쌍봉을 통해 고갯길이 휘돌아간 고향의 재를 연상할 수 있고, 먼 산으로부터 출발해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흘러내린 뒷동산을 떠올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쌍봉형 경석의 참된 맛은 ‘조화와 화합의 미학’이라는 그 특유의 철학적 의미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때로 음양의 조화를 뜻할 수도 있고, 적대감과 갈등을 청산하고 화합의 마당에서 만나야 한다는 역사의 당위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나아가 우리는 크고 작으며 높고 낮은 주봉과 부봉 혹은 원산과 근산을 통해 ‘부조화의 조화’라는 역설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다. 게다가 쌍봉은 앞길을 가로 막아서는 거만하고 무뚝뚝한 존재가 아니라, 작든 크든 지나갈 길을 열어주며 비켜서는 너그러움과 포용력의 표상이다.

그래서 열리는 길은 괴나리봇짐을 지고 서울로 가는 선비들이 쉬어 넘던 고개일 수도 있고 불콰하게 취기가 오른 농부가 손에든 간고등어 한 손을 경쾌하게 흔들며 허청허청 내려오던 그 고개일 수도 있다. 그럴 때 좌우의 산에서는 이름모를 산새와 풀벌레들이 나직하게 울어주고, 한 차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이마에 맺힌 땀을 씻어주기도 했으리라. 이러한 감흥을 떠올리며 쌍봉형 경석을 감상해 보자. 지금까지 몰랐거나 제쳐두었던 의미가 다시금 새록새록 피어오를 것이다.


연봉형의 준엄한 장관

기상천외한 기관(奇觀)이 전개되어 있는 산수경석으로서 오른쪽의 연봉(連峰)은 단아한 품성을 깨우치는 한 폭 동양화처럼 잔잔히 흐르고 있어 태고의 고요가 맴돌아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는 것 같다.

 

 

 

 

 

우리의 풍경과는 너무나 먼 이국의 풍광으로 그랜드캐년의 단애(斷崖)를 연상케 한다. 이렇듯 하나의 경석에서 동서양의 경치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훌륭한 돌이다.


주봉이 우뚝 솟고, 그 앞이나 좌우에 서너 개의 봉(부봉)이 비죽비죽 솟아오르고 주봉과 부봉 사이 먼 자리에 원봉이 더 있으면 대자연의 경관을 그대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기품 있고 우아한 봉우리 그 밑으로 힘차게 뻗어 내린 산맥의 박력-능선의 조용한 흐름-기괴한 골짜기의 고숙-산기슭의 목가적인 전원시.  이런 자연 경관에 감상의 초점을 맞추면 시원하고 오묘한 맛을 풍성하게 가질 수 있다. 욕심이라면 이런 산골짜기에 하얀 석영이 박혀 폭포까지 우람하게 떨어지면 그 물소리가. 산새 소리가, 솔바람 소리가 귀에 맴돌아 감상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연봉형은 산지마다 풍화의 변화에 따라 두 가지 형으로 나눌 수도 있다. 강돌은 고운 피부에 완만하고 유연한 선의 산형이고, 산돌은 거친 피부에 날카롭고 살이 여윈 산형이 된다. 어느 것이나 모두 산 전체의 형이 하등변삼각형의 모양이 좋으며, 변화와 조화의 아름다움을 중요한 감상점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평원석(平原石) 감상의 포인트

특출한 형태의 평원형으로 까마득한 벌판 저 멀리 유연한 능선을 거느린 원산이 솟아 원경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우측에는 완만한 산 주름이 펼쳐나가며 좌측의 산기슭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맞닿고 있어 실경의 이치와 합일하고 있다. 이토록 하나의 평원석에서 근경과 원경을 동시에 관상할 수 있는 돌은 그리 흔치 않다.

천연이 빚어 만든 조화의 묘가 가득 담겨진 돌, 저 단단한 경질의 돌이 저처럼 광막한 풍경의 평원석으로 다듬어질 때까지 몇 천 몇 만 년의 풍상과 우세로 씻기며 다듬어졌을까?


평원석은 오성(悟性)이 빚는 향수라 할 수 있다. 불과 한 뼘의 돌 속에서도 수백 리에 펼친 광활한 벌판이 있고 다시 그 너머로 아득히 먼 산이 보임을 느낄 수 있다. 이 때에 문득 구양수가 시로 읊은 안생 오성이 마음을 흔들게 한다.


‘가도 가도 청산은 아득하기만 하고 자신은 여전히 끝없는 삶의 잡초 밭에서 헤매고 있음.’을 깨달을 때 새삼 사람들은 자기가 어째서 이 황량한 삶의 잡초 밭에서 한없는 고독을 느끼는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또 생명 본질의 영원한 안식처가 어디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되고 삶의 의지를 깨닫게 된다.


이때에야 비로소 지혜로운 자는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조리며 유한한 인간본연의 세계로 돌아와 밭 갈고 나물 먹으며 먼 곳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손바닥만한 작은 돌 위에 천리의 평원이 새겨져 있고 아득한 산그림자가 드리울 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다. 평원석을 볼 때마다 그 놀라운 입체적 원근미에 감탄과 함께 신의 숨결을 느끼곤 한다.


평원석은 마음이 한가롭고 여유가 있을 때 감상하는 것이 가장 좋다. 조용히 차를 한 잔 마신 뒤나 불현듯 누군가가 그리워질 때 가장 쉽게 감상할 수 있는 것이 평원석이다. 아무 곳에나 앉은 자리에서 좌대에 연출된 돌을 보면 금방 돌 위에 드리운 정경 속으로 빠져들 수가 있다. 이렇듯 한순간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 평원석 말고는 없을 것이다.

평원석은 눈높이고 들고 보아야 평원의 원근이 입체감 있게 살아나며 크기가 한 뼘 이내의 것이어야 견고하고 단아한 맛을 느낄 수 있다.


평원석의 균형미

수석은 차분한 돌일수록 균형미가 완벽해야 한다. 형태가 단조롭기 때문에 조그마한 결함도 한눈에 드러나 버리기 때문이다. 평원석을 볼 때 가장 먼저 균형을 보는 것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평원석의 균형미는 모암의 생김새가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무리 평원석이 잘생겨도 모암이 불균형하면 정감이 가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모암은 평원석을 이루는 바탕일 뿐 아니라 눈에 가장 잘 띄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모암에는 여러 형태들이 있다. 타원형이 있는가 하면 장방형이 있고 사각형이 있는가 하면 삼각형, 원형, 심지어는 마름모꼴도 있다.

선택하는 방법은 타원형이나 장방형 같은 것이 가장 적합하다. 이유는 얼마쯤 길게 늘어진 맛이 있어야 평원다운 시원한 분위기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산봉우리의 형태와 위치

평원석에서는 산봉우리의 형태 또한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가끔 평원석 중에는 상단의 평은 시원하게 다듬어져 있는데도 실경 같은 풍정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 돌이 있다. 그런 돌은 우선 산봉우리의 생김새를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혹시 산봉우리가 다음과 같은 모형을 하고 있는지.


? 산봉우리의 형이 뚜렷하지 않다.

? 산봉우리는 있으나 기슭이 보이지 않는다.

? 산봉우리가 평원에 비해 너무 크거나 작다.


평원석 속에 산봉우리가 이런 형상을 하고 있으면 형상석에서 생명력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실경다운 정취를 맛보기 힘들다. 역시 평원석의 산봉우리도 산형에서처럼 길고 유연한 능선이 있어야 아득한 평원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위치 또한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산봉우리의 위치에 따라 평원의 풍정이나 원근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평원석 속의 산봉우리도 자세히 보면 그 위치가 아주 다양하다.


? 평원의 중앙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

? 전면 중심에 자리 잡아 시야를 가린 산봉우리

? 평원의 한 끝에 솟아있는 산봉우리

? 좌우 양 끝에 솟은 산봉우리

?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솟은 산봉우리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위치는 중심을 슬쩍 비켜 전체 길이의 10:7이나 10:7.5 또는 10:8 정도에 솟아 있는 산봉우리가 가장 자연스럽다. 여기에 자그마한 애기봉이 하나 솟아 있다면 금상첨화로 평원은 더욱 아득해 보일 것이다.



낮은 평원과 높은 평원석

다음은 평원석의 종류에 대해 알아보자. 평원석은 크게 낮은 평원과 높은 평원 두 가지가 있다. 이는 모암의 형태로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모암의 생김새가 낮고 잔잔하면 낮은 평원이며 모암이 바위처럼 높고 위태로우면 높은 평원이다.


둘 다 평원의 정취를 지니고 있으나 감상하는데 있어서는 그 맛과 분위기가 다르다. 낮은 평원이 시원한 실경 속의 경치라면 높은 평원은 무겁고 엄숙한 별천지 같은 비경의 분위기를 안겨준다. 뿐만 아니라 모암의 형태나 균형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다.


낮은 평원은 실경을 바탕으로 한 까닭에 빈틈없는 균형미가 요구된다. 반면에 높은 평원은 비경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에 모암의 균형이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일 수도 있고 밑면이 들뜨기도 하며 앞으로 넘어질 듯 위태로운 것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불균형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위태로울수록 더욱 비경의 맛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높은 평원도 상단의 평원만큼은 빈틈없는 균형미를 이뤄야 한다. 이는 높은 평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번에는 평원석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몇 가지를 살펴보겠다. 먼저 ‘뒤로 돌아가는 형’을 주의해야 한다. 이는 어떤 돌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선이 단순한 평원석에서는 더욱 주의해야 한다. 모암의 좌우 양 끝이거나 산봉우리 어느 한쪽도 마찬가지이다. 뒤로 쏠리거나 돌아가면 형편없이 평원의 분위기가 불균형하게 보인다. 이런 유형의 돌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 ‘사선과 사면’을 피하는 것이 좋다. 이 또한 모든 수석에서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평원석에서는 모암은 물론이고 산봉우리의 어느 부분에라도 이 사선이 나타나면 견고한 맛을 줄어들게 할 뿐 아니라 유연하고 시원한 분위기를 반감시킨다. 평원석에서 이를 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뒤틀리고 기울어진 것’도 대단히 위험한 요소이다. 모든 수석들이 다 뒤틀리고 기울어진 것을 싫어하지만 특히 평원석에 있어서는 그 결함이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산봉우리가 잘생긴 평원석이라도 평을 이루는 면이 뒤틀리거나 기울어지면 아늑한 맛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 평원석이 아닌 토파나 바위경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백팔번뇌 말끔히 씻어 내리는 폭포 물줄기

폭포석은 힘과 아는 자의 도장이다. 폭포를 바라보고 시원함 만을 찾는다면 그것은 눈은 있지만 마음이 닫힌 탓이다. 천길 아득한 물줄기를 바라보면 한 점의 돌에서도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릴 것이며, 하늘로 치솟는 힘을 느끼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무한과 영원으로 통하고 싶은 꿈이 그 속에 나타 나게 된다.


여름 더위를 식히는 데는 폭포석보다 더 좋은 수석은 없다. 시원하게 쏟아 내리는 물줄기며 뽀얀 물보라, 물보라 속 무지개, 천둥 같은 물소리 등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후련해진다.

그러나 폭포석은 수석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돌이다. 단단한 돌에 수려한 산세를 지니기도 어려운데 물줄기를 연상케 하는 하얀 이물질이 박히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폭포석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폭포석은 경정이 담백해서 좋다. 수석을 모르는 초보자라도 단번에 그것이 폭포인 것을 연상할 수 있다. 어디 그 뿐인가. 폭포석은 입체감이 뛰어나 시각 뿐 아니라 물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좀 더 상상력이 풍부한 수석인이라면 물보라 속에 피어오르는 무지개까지도 볼 수 있다.


폭포석은 원경폭(遠景瀑)과 근경폭(近景瀑)이 있다. 원경폭은 수려한 산봉우리 사이로 은하처럼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경관을 말한다. 멀리서 바라본 경관이라 산 전체가 한눈에 보일 뿐 아니라 물줄기가 은하수처럼 아련하다. 그야말로 폭포석 중의 진수라 할만하다. 하지만 이런 폭포석은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원경폭은 상상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돌인지도 모른다.


근경폭은 바로 눈앞에 그려진 폭포를 말한다. 시점이 폭포와 가까이 있어 산봉우리가 보일 리 없으며 아득한 절벽과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줄기만 보일 뿐이다. 근경폭의 매력은 힘찬 박진감에 있다. 대개 근경의 돌들이 다 그렇듯이 바로 눈앞에 전개된 경관이라 꿈틀거리는 물줄기가 그대로 폭포의 장관을 실감케 한다.


폭포의 시원하고 우람한 경관을 관상하면 시흥에 젖지 않을 수 없다. 폭포석을 감상할 때 시취에 도움이 되고자 옛 선인들이 관폭하며 읊은 한시 몇 수를 소개한다.

△ 뜬 구름이 푸른 산봉우리에서 떠오르고 쏟아져 내리는 폭포는 청산을 움직이도다. 푸른 산 봉우리하고는 서로 잘 알고 있으니 뜬 구름이 왔다 갔다 하노라.

 

△ 만 길이나 높은 까마득한 바위를 우러러보고 백 길이나 깊은 물을 굽어본다.


△ 여름날에 낮이 길어 아무 일도 없으니 홀로 앉아 쏟아지는 폭포가 시내에 흘러 들어가는 것을 보노라


△ 폭포소리는 바로 하늘의 음악이니 홀로 공산(空山)에 앉아 돌아가기를 망설이노라.


△ 산 아지랑이는 아름다운 나무를 둘러싸고 겹쳐진 바위에서는 야천(野泉)에 물이 쏟아져 내리노라.


△ 속세의 티끌을 피하고자 한다면 이곳이 좋으니 석양에 종소리가 구름 넘어서 드문드문 들리로다. 구름밖에는 물결이 천 길이나 시끄럽게 쏟아지니 바위 앞에 한 자루 지팡이를 짚고 있노라.


△ 폭포가 백 길이나 높이에서 쏟아지니 대낮에도 서늘하고 고수(古樹)와 푸른 이끼는 비가 지나가니 얼룩이도다. 무엇이 산인과 닮아서 속세를 떠난 맛이 있으리오. 마음을 씻고 발을 닦고서 스스로 기어올라감이로다.



폭포형의 감상 포인트


옛 선인들은 이렇듯 작은 돌에서도 우렁차게 귀를 때리는 물소리를 듣게 됨을‘어찌 만금의 가치와 바꿀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이 돌을 머리맡에 두고 잔다면 아마 밤새 요란한 물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리라. 산 한복판 적절한 위치에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물기둥이 많은 수량을 갖고 떨어져 시원스런 청량감이 넘친다.

하나의 폭포석은 자연히 내뿜는 푸른 숨결과 생동하는 맥박을 리드미컬하게 느끼게 하는 돌이다. 오염된 혼탁한 도시에서 햇빛이 어둡게 보일 때, 각박한 세속에서 짜증이 날 때, 무언가 욕구불만으로 오랫동안 축적되었던 응어리가 터질 듯이 아플 때, 이 폭포의 경관을 바라보면 가슴이 탁 트일 것이다. 폭포석이란 산형으로 생긴 돌 표면 어느 쪽에 하얀 석질(석영, 방해석, 석회석)이 물줄기처럼 내리 쏟아지는 모양으로 석면에 박힌 것을 말한다.


돌은 動과 靜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 살아 움직이는 돌의 본보기가 바로 이 폭포석일 것이다. 그러므로 폭포석 감상의 중요 포인트는 생동감 넘치는 박력과 율동미, 그리고 자연스러움을 찾아야겠다.


폭포석을 보는 중요한 관점을 몇 가지 소개하면

첫째가 흐르는 물줄기에 약동적인 느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물 흐름에서 변화와 수세를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라야만 관상자가 박력, 시원스러움에 경탄하고 황홀경에 빠지는 것이다.


단적으로는 폭포의 수세만으로도 동적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돌 전체가 풍기는 동적 느낌이 더 절실한 것이다. 가령 직하형의 경우를 보자. 옆으로 누운 듯한 모암의 형태에서 보다 입체적으로 생긴 모암의 형태에서 폭포의 느낌이 한결 살아날 것이 아니겠는가.

모암, 폭포 더불어 입체적일 때 비로소 낙하하는 폭포의 남성적이고도 생생한 정경을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긴 하지만 입체적인 경정에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전감이 따른다. 따라서 돌을 받치는 발쪽에 힘과 무게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관상 가치도 높아진다. 폭포의 경정 이상으로 모암의 형태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해 두고 싶다.


둘째는 필연성과 자연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폭포석 중엔 산이나 바위형의 모암 꼭대기에서 폭포가 흘러내린 것이 있다. 혹은 폭포가 앞뒤로 걸친 것도 있다. 이런 형태의 것을 두고 샅바를 찼다고 한다.

 

실지로 바위 꼭대기에서 폭포가 흘러내리는 기상천외의 그런 자연경관이 있겠는가. 또 산 뒤로도 흘러내리는 폭포가 있겠는가. 그러니까 필연적이고 자연스런 폭포의 물의 **점이 일반적으로 모암의 정상에서 약간 내려온 것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다. 폭포 둘레의 경정도 산이나 바위를 연상시켜야 하고 수원이 될 만한 조건도 조성되어 있어야만 필연적이고 자연스럽다.


셋째로 폭포가 흐르는 위치도 적절하고 여운 있는 것이어야 한다.

모암의 좌우 어느 쪽으로든지 7~3부, 6~4부의 위치로 되어 있어야 적절할 것 같다. 그래야만 한복판에 위치해 있기보다 여유가 있고 여운이 생긴다. 이렇게 따져 볼 때 이상적인 직하형 폭포석이란 정상에서 약간 내려온 곳, 그것도 모암의 좌우 7~3부의 곳에서 발원, 낙하하기 시작해서 점차 수세를 세차게 한 끝에 낙하지점에 이르러서 물보라를 피우고 소용돌이치는 정경을 보여 주는 것이 되겠다.



單瀑(외줄기 폭포)의 시원한 경관

폭포석으로서는 좀 단조로운 맛을 풍기지만, 여기서도 그 떨어지는 양상에 따라 그 맛이 각각 달라진다.

첫째 직하형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천야만야한 절벽에서 밑으로 곤두박질하듯 떨어지는 폭포를 말함인데 감상의 포인트는 생동감 넘치는 박력이 있는 가 없는가에 있다. 우선 폭포의 높이를 가늠해 보아야 한다. 폭포의 높이가 높을수록 박력 있는 물소리가 지축을 흔들 것이다.


폭포의 높이가 얕으면 얕은 대로 거기서 풍기는 맛이 따로 있겠지만, 장관을 이루는 웅장미는 없다. 폭포하면 우선 시원함을 맛보려고 한다. 이 시원함이란 박력 있는 물의 낙하이다. 그러므로 이 직하형의 폭포에서는 높을수록 그 시원한 맛도 높아진다.


다음은 분기형으로서 외줄기로 떨어지다가 어느 부분에서 두 줄기로 떨어지는 양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쌍폭과는 다르다. 직하형의 단조로움에 비해 매우 운치 있는 폭포이다. 외줄로 덜어지다가 어느 바위에 힘차게 부딪치면서 두 줄로 짝 갈라지는 경관은 확실히 운치 있는 정경이다. 여기서는 그 갈라지는 물 가름의 자연스러움이 있어야겠다. 그리고 굴곡의 변화를 일으키며 떨어지는 리드미컬한 요소가 있나 없나를 감상의 요점으로 생각해야겠다.


마지막 곡절형은 굽이친 골짜기를 휘돌며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단폭에서는 가장바람직한 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선 유동미가 있어 좋다. 굽이굽이 감돌며 떨어지는 폭포는 자연미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다.


아담하고 소박하게 생긴 이상적인 원산 한복판에서 새하얀 비단폭 같은 물줄기가 곡절(曲折)하며 떨어지고 있다. 먼데서 바라보아도 계곡을 뒤흔드는 굉음이 귀를 찢을 것 같고 하얗게 비산하는 물보라가 꽃잎처럼 흩날릴 것 같다. 폭포석은 수원이 되는 **의 위치가 골짜기 깊은 곳에 있어야 하고 물기둥의 수세가 생동하는 기운이 있어야 한다. 위의 돌은 여기에 합당하여 고맙다. 밑자리 산기슭도 안정감 있게 차분히 잘 마무리되었고, 물기둥이 떨어지는 낙하지점은 오랜 날 물살에 수식(水蝕)되었음인지 움푹 들어가 배들이가 형성되어 경정에 보탬을 주고 있다.


이 밖에도 힘차게 떨어지다가 작은 웅덩이를 만나 잠시 쉬었다가 다시 내리쏟는 폭포 등, 자연경의 경치는 헤아릴 길 없다. 어느 형이든 갖추어야 할 몇 가지를 첨부하고자 한다.

물줄기가 되는 흰 석질이 윗부분에서는 가늘게 박히면서 밑으로 내려올수록 점차 폭을 넓혀야 한다. 다음은 폭포의 수원이 될 만한 뒤의 배경이 있어야 하겠다. 즉 수원을 이룰만한 뒷면의 작은 봉우리에 골짜기가 있어서, 거기서부터 시점이 되어 쏟아져야 한다.

그리고 물줄기는 좌우에 흠이 패여 깊숙한 골짜기를 이룬 암벽 위에서 떨어져야 바람직하다. 또 석영이나 석회질이 돌 전체를 한 바퀴 감돌아 간 것도 유의하여야 할 일이다.


쌍폭형(雙瀑形)의 조화미

 

수원이 각각 다른 곳에서 두 줄기 폭포가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두 줄기의 폭포가 변화 있는 조화를 이루어야 바람직하다. 즉 주류가 되는 한 줄기가 굵으면 또 한줄기는 가늘어야만 심미상 조화가 이루어진다.

힘의 균형으로도 하나가 강세로 떨어지면 하나는 약세로 떨어지는데 한 줄기는 곡절 형으로 굽이굽이 맴돌며 떨어진다면, 두 줄기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심미상으로도 볼품이 없다. 그러므로 이 쌍폭에서는 물줄기의 양상이 두 줄기 똑같이 직하면 직하, 곡절이면 곡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좋다.


위의 사진은 두 줄기의 폭포가 서로 다른 곳에서 수원을 이루어 가운데 폭포는 콸콸 넘치는 직하형으로 시원하게 떨어진다. 우렁찬 물소리가 귀에 맴도는 것 같고 박력 넘치는 폭포의 활기찬 모습에서 생동감을 느끼게 된다. 왼쪽 산기슭 끝에 곡절형으로 휘어 떨어지는 폭포는 애교스럽고 운치 있는 경관을 보태고 있다.


계류형(溪流形)에서 거문고 소리를……

산골짜기 조약돌 사이에서 흐르는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 같다. 한가롭게 눈을 감고 고요히 들으니 티끌 낀 마음 깨끗이 씻어준다. 골짜기 양쪽에서 푸른 이끼 자란 이 돌을 우습다 말라. 하룻밤 물소리를 듣는 것 만금의 가치가 있도다. 당대의 문인 백낙천은 이끼 푸른 골짜기에서 계류가 넘치는 듯한 형상의 돌을 관상하면서 이렇게 읊었다. 그의 시심은 하나의 작은 돌에 집약되어 축경의 세계를 폭넓게 깨우치고 있었다. 폭포가 박력 있고 웅장한 남성적이라면, 계류는 운치 있고 우아한 여성적이랄 수 있다.


조약돌을 핥으며 흐르는 물소리는, 우아한 여인이 자연을 읊는 거문고 소리 같다. 폭포가 지축을 흔들며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개선 행진곡처럼 환희와 승리에 충만 되었다면, 계류는 세속의 근심을 달래듯이 조약돌을 어루만져 주고 때로는


앙탈하듯 바위에 부딪쳐 통곡도 해보는 가냘픈 여인의 몸부림 같다. 지금까지의 통례로 보아 돌에 흰 줄기가 박혔으면 무조건 폭포석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폭포와 계류는 그 흐름의 상태나 그 경의 느낌이 위에 적은 대로 판이하다.

각도까지 따질 것은 아니지만, 대개 45도 경사로 굽이굽이 흐른다면 계류로 보아야 할 것이다. 폭포석의 크기는 작은 돌에 흰 줄기가 굵게 박혔다고 큰 폭포랄 수는 없다.

여기엔 돌 전체의 경정을 살피는 감각과 그 돌의 크기에 따라 차지하는 흰 줄기의 폭이 협소한가 광대한가에 따라 구분해야 된다. 즉 돌 전체의 경과 흰 줄기와의 비례를 가름해야 된다. 끝으로 폭포석이란 골짜기에 유현한 기운이 있어야 하고, 거기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을 느끼게 하고, 그 돌에서 시정이 넘쳐야 한다.


사진의 계류형은 멀리서 바라본 원산의 길고 머나먼 계류이다. 기세 좋게 우뚝 선 주봉에서 서운(瑞雲)이 감도는 듯하고, 산허리 중복에 살짝 고개를 내민 듯한 부봉이 애교스럽다. 그 봉의 유연한 골짜기에서부터 실낱같은 물이 시작되어 산을 가로지르는 기나긴 벽계수가 기슭까지 이르는 동안, 때로는 굽이쳐 흐르고 때로는 거센 폭포도 되면서 흐르는 듯하다.


흰눈 덮인 설산석(雪山石)의 신비

눈 덮인 산의 상징은 아무래도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백두산이다. 이름도 흰머리산(白頭)이 아닌가?

일년이면 절반도 넘게 흰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백두산은 말 그대로 민족정기의 고향이요 생명의 시원이다. 시커먼 화산암이 빚어낸 기묘한 봉우리들만 있다고 한다면 그 경치는 괴이할 뿐 신비롭지는 않을 것이다. 눈 덮인 흰 산은 바로 신비함을 더해주는 중요한 장치이다. 육당 최남선 선생은 백두산을 한 번 둘러보고 난 뒤

“우주미의 가장 신비한 면을 이만치 강렬하게 시현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고 감격에 차 말했었다.


하얀 눈이 덮인 먼 산,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마치 품 안에 있는 듯한 푸근함을 주는 먼 산의 봉우리들은 흰 눈을 한아름 안고 있다. 눈 덮인 푸른 산의 정취는 한껏 아련하기만 하다.

눈 덮인 설산을 보면 어떤 정한이 솟아오르는가? 고려 말 목은(穆隱) 이색(李穡)은 그 눈산을 보며 갈 곳 몰라 방황하는 심경의 한 끝자락을 드러내고 있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예로부터 이 땅의 사람들에게 눈은 하늘이 인간에게 이익을 주려고 내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전라도 어느 지방에서는 ‘첫 눈을 손으로 받아먹으면 눈이 밝아진다.’라는 속담이 있기도 하다. 함박눈을 보고 즐거워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여전하다.

다른 속담을 보면 ‘결혼 첫날밤에 눈이 오면 좋다.’, ‘그 해의 첫눈을 먹으면 집에 꿩이 들어온다.’, ‘장사 지낼 때 눈이 오면 좋다.’, ‘첫눈 위에 넘어지면 일년 내내 재수가 좋다.’ 라고 하듯이 순백의 하얀 눈을 길상(吉祥)의 징조로 보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한편 ‘눈은 보리이불’이라는 말도 있는데 산 위를 덮은 눈도 그 산 아래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식물들에게는 그대로 생명의 이불이 된다. 다만 뭇짐승들은 먹이를 구하지 못해 민가로 내려오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그 짐승들을 잡지 않고 먹이를 충분히 먹여 돌려보내기도 했다.


이 같은 마음은 산신령도 굶주린 짐승이 딱해서 내려 보낸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동양의 전통적인 도교사상에서 보면 눈은 천상에서 오는 것이고 지상에 쌓인 눈은 희고 깨끗하기가 천상의 세계를 연상시키며 그 신비경에 빠지게 한다.


백설이 분분한 날에 천지가 다 희도다.

우의를 떨쳐입고 구당에 올라가니

어즈버 천성(天性) 백옥경(白玉京)을 미쳐 본가 하노라.


고 노래한 임의직의 시를 보면 백설이 뒤덮인 은세계에 선 작자는 천상의 선경 즉 옥황상제가 산다는 백옥경으로 착각할 만큼 감탄한다. 물론 은세계는 천상도 아니요 입은 옷은 신선이 입고 있는 우의도 아니다.

그러나 작자는 은세계를 보고서 신선이 된 기분이 된다.

이 같은 상상력은 오늘 찬 문풍지 바람을 등에 지고 설산석 한 점을 마주한 석인의 가슴 속에서도 그대로 피어난다.


설산을 바라보는 정취는 아무래도 즉흥적이기 쉽다. 눈은 곧 녹아 없어질 운명을 타고난 것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아주 쉽게 감정적 동요와 충동을 겪는다.


조용한 호수석의 깊은 맛

멀리 부드럽게 이어져 뻗은 서너 개의 산봉우리들 이 산봉이 절벽을 이룬 아래에 드넓은 호수석이 펼쳐져 있다. 이 호수에는 산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데 구름이 머무는 곳, 밤에는 별과 달이 비치는 곳, 물새들이 오락가락 노니는 곳이다. 이런 호수석의 운치와 풍경을 시로 읊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호수석은 그림자를 형성하는 형태라야 격이 풍긴다. 돌에 물이 고였을 때 나타나는 그림자는 수면에 나타날 물체가 예각을 이룰 때 잘 나타난다. 둔각일 때는 그림자를 보기 어렵다.

다시 말하면 수면과 물체의 각도가 직각을 벗어날수록 그림자의 형태가 잘 안보이게 된다. 그림자의 종류는 음영과 투영이 있다. 물고임돌에서는 투영을 원하며 이 때에는 자연의 한 장면 같은 신비로움과 실경 같은 느낌을 얻게 된다.


음의 형태에서는 음이 하늘 쪽으로 향할 때 물이 고인다. 음의 대소를 가리지 않고 물은 파인 부분만큼 차고 낮은 곳으로 넘친다. 인공이든 자연이든 막론하고 호수는 청정함이 조건이다. 그리고 둘레에 물체나 수면보다 높은 것이 있을 때에는 수면에 투영되고, 그림자를 안고 있는 물고임 풍경은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이런 자연의 나타남과 이룩됨을 한 덩이 돌에서 연출시켜 음미하는 맛은 애석인들만의 전유물일 것이다. 작은 돌에서 거대한 자연을 연상하는 것이 취미의 목적인 것이다.


호수석이 주는 의미는 신선이 살아가는 선경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실내에 있는 한 덩이 호수석 안에 하늘이 잠기고 산이 거꾸로 잠겨 있음을 보게 된다. 산골의 내음이 풍겨오는 심산유곡 같은 한 덩이 물고임돌이 주는 의미는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수석은 어떤 대상물보다 위대하다.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그래서 호후석 한 점을 소유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돌을 뒤지기도 한다.


물이 고이는 돌의 조건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자. 깊이 파였거나 넓게 이룩된 것도 좋지만 호수석의 물고임 부분은 어두운 색이어야 좋다. 물고임 부분이 밝은 색은 투영이 안 된다. 밑바닥이 보여 깊이를 느끼지 못한다. 어두운 색의 호수 바닥은 투영이 잘되므로 빛이 흡수되는 밑바닥 호수는 엷은 물고임이라도 깊은 호수로 느껴지게 한다. 또한 나타나는 그림자가 명확하며 신비로움이 많아 호수 앞에 오래 앉아 자연을 만끽하는 평화로움이 온다.


湖水石에 담겨 있는 詩情

호수는 갇힌 세계이다. 바다와 육지가 수평선과 지평선을 품고 있는 열린 세계라면 호수는 안으로 웅크리고 깊이 침잠하는 자기성찰의 영역이다. 그래서 호수에는 그 특유의 풍정과 함께 감칠맛 나는 시정과 서정이 함축되어 있다. 사람들은 잔잔하게 일렁이는 수면과 거기에 어리는 산그림자, 깊이를 알 수 없는 물밑세계에 대한 환상을 맛보기 위해 호수를 찾는다.

예부터 수많은 문인들이 호수를 즐겨 시제로 삼고 화제로 잡았던 것도 이런 까닭에서일 것이다. 그들은 호수가 가진 감성적이고도 절제된 풍정과 예술혼을 일깨우고 예술가를 놓아주지 않는 끈끈한 마력에 사로잡힌 채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더러는 호수의 이런 풍정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도 있었다. 비록 축소된 규모이지만 사대부집 뜰에는 대개 크고 작은 연못이 석가산과 조화를 이루며 자리 잡았다. 사실감을 더하기 위해 수초를 심고 물고기를 기르도록 했다. 그곳에다 누각을 세우고 청풍명월의 한담을 나누거나 세상사를 논하기도 했다.


요컨대 산과 들이 남아의 기상을 배우고 웅지를 펴는 마당이었다면 호수는 자기 비춤을 통해 내면세계를 가다듬고 새로운 힘의 원천으로 삼았던 일종의 ‘거울’이었다. 전자가 武의 세계라면 후자는 文의 세계인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호수형 경석을 귀하게 여겨왔다. 그래서 자그마한 물고임이라도 있다면 그곳에 물을 채워 넣고 산수경의 극치를 맛보고자 했다. 이럴 때에는 물론 직경 2~3cm의 물고임을 통해서 넓고 시원한 호수와 산그림자가 투영된 수면을 연상할 수 있어야 한다.


일례로 호수석에 대한 미원장의 감상안을 살펴보자. 그는 연산석 기슭에 있는 자그마한 물고임을 가리켜 “깊고 맑은 물이 하늘의 경치를 모아 투영시키고 있다.”고 표현했다. 그는 또 호수석을 가리켜 “물이 고여있는 돌은 맑고 얕아서 경쾌하고 깔끔한 시인의 심성과 같으며 그 돌을 떠나 있으면 보배로운 금향로처럼 자주 생각이 난다.”고 쓰기도 했다. 호수석에 대한 찬탄은 우리나라 선조들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컨대 「예석기(禮石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 주목을 끈다.


“산위의 못에는 여러 별자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산봉우리의 붉은 기운은 기슭에 이르러 점점 사라져 간다.”


요컨대 옛 사람들은 수석에 형성되어 있는 물고임을 단순히 호수나 연못으로만 보지 않고 자연경을 투영하는 반사체로 보았던 것이다. 이런 자세는 결국 내면세계에 대한 자신의 성찰과 호수석이 지닌 독특한 서정을 하나의 고리로 연결한 결과일 것이다.


호수형 산수경석은 물고임의 위치와 돌 전체의 형태에 따라 몇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예석기」에서와 같이 물고임이 산 정상에 형성된 경우에는 산정호가 될 것이다. 백두산 천지와 한라산 백록담 등에서와 같은 신비함과 장쾌함을 이런 돌에서 맛볼 수 있다.

다음으로 산 중턱에 형성된 호수는 산록호가 될 것이고 들판과 같은 평지에 만들어진 것은 평원호라 할 것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먼 산 아래 넓고 깊은 호수 하나가 가득히 자리하고,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듯 고요하고 해맑은 湖面에는 하늘의 뜬 구름과 산 그림자가 얼비치고…….낮은 원산의 봉우리를 기점으로 좌우 흘러내린 능선의 부드러운 유선미가 고아하고 그 품에 하나 가득 안은 크고 넓은 호수는 만고의 신비를 머금은 채 침묵하고 있다. 조용히 흘러내린 산과 고요한 호수가 하아로 잘 어울려 대자연의 경취와 정서가 가득히 퍼진다.


호수하면 우선 정지된 고요를 느끼게 한다. 번거롭던 마음도 이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면 차분히 가라앉게 된다. 앞서 말한 폭포석이 동적이라면 호수석은 정적인 고요하고 조용한 돌이다.

푸른 산 그림자가 한 쪽에 그림처럼 물들여 있고, 거울 같은 수면위에 수놓듯 점점이 아로새겨진 목화송이처럼 부푼 뭉게구름의 한가로운 낭만, 그 고요한 호심에 속된 마음을 묻어버리고 조용히 호수석을 감상해 보자.

호수석은 자연의 지리적 위치와 형성되는 조건에 따라 그 유형이 달라진다. 가장 작은 경이라면 물웅덩이 또는 옹달샘 등일 것이고, 그 다음이 못(池)이고, 못보다 더 큰 경치는 늪 또는 호수가 된다. 이럴 때 호수를 제외하고 물웅덩이나 옹달샘, 연못 같은 상황에서는 산이 에워싸고 있을 수가 없다.

연못 같으면 들판을 연상시키는 작은 기복의 언덕 같은 것이 있으면 족하고, 옹달샘일 경우엔 절벽 같은 암벽이 뒷면을 가리고 있든가 움푹 패 인 바위 형태에 물이 괴었으면 될 것이다. 이상의 것은 자연의 경과 닮은 형상이지만, 이와 달리 아무 경정도 없이 그저 물만 괴어 있는 돌이 있다.

이런 돌이 풍기는 또 하나의 이미지를 감상할 수 있다. 이것은 자연의 경관으로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차원을 달리하여 정신적인 마음의 돌로서 감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즉 돌에 담긴 물을 티 하나 없는 맑고 깨끗한 정한수로 봄으로써 마음이 청결해짐을 느끼게 되고, 정지도니 물속에서 태고의 신비를 느껴 자연을 사색할 줄 아는 마음의 문이 열릴 수도 있다.


다음은 담(潭)의 경(景)을 감상해보자. 백두산의 천지, 한라산의 백록담 등 커다란 화산구에 물이 괴어 이루어진 경관을 말한다.

이것은 호수보다는 작은 스케일의 정경을 말하는데, 이 역시 물가 주변에 암벽이나 산형세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 담의 위치는 산 중복에서 정상까지에 자리 잡은 것이 경관도 좋을 뿐 아니라 담의 운치도 훨씬 높아진다.

그리고 돌에 물굄이 넓다고 큰 호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이 적게 괴었더라도 전체적인 산수의 조화와 형태가 광대한 스케일을 지니고 있으면 호수의 정경을 느낄 수 있다.

반대로 물이 폭넓게 괴어 있더라도 자연경의 국한된 일부분만 표현된 협소한 감을 주는 스케일일 때는 전체적인 균형으로 보아 못(池)이나 물웅덩이로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물이 많이 괴었다고 무조건 호수석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균형과 스케일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은 유의해야겠다.


섬(島形)의 풍광을 느끼는 감상 포인트


섬형의 수석을 제대로 감상하고 싶다면 단 한 점의 섬형을 눈에 잘 들어오는 곳에 연출하고 창문을 활짝 연 다음 망망대해에 뜬 섬을 연상하며 바라보면 된다. 그러다보면 한여름의 더위에도 등줄기에 솔바람이 일고 눈앞에 푸른 바다가 펼쳐지게 된다.

바다의 정경은 외롭고 쓸쓸해야 더욱 짙은 감회가 생긴다. 같은 섬이라도 작고 위태로운 형이 더 마음을 사로잡으며 애틋한 정이가게 마련이다.


섬의 종류와 섬으로 이루어지는 성인

섬형의 감상을 위해서는 섬의 다양한 형태를 익혀두는 것도 유익하다. 섬은 인적의 유무를 따져 유인도와 무인도로 나뉜다. 그리고 그 수와 놓인 형태에 따라 외롭게 떠 있는 고도(孤島)가 있는가 하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군도(群島)가 있다. 징검다리처럼 길게 늘어져 있는 열도(列島)도 있다. 이것들은 지각변동이나 지질의 변화에 따라 그 형성과정이 다르며 그에 따라 지질학적인 명칭도 다음과 같이 나뉜다.

 

‘대륙도’는 대륙의 일부가 융기되거나 분리되어 이루어진 섬으로 비교적 규모가 큰 섬이다. ‘화산도’는 해저의 화산이 폭발하면서 화산재와 같은 퇴적물이 수면 위로 나타나 만들어진 섬이다. ‘퇴적도’는 생물의 유해나 강의 상류에서 밀려온 토사와 같은 퇴적물이 쌓여 이루어진 섬이다.

우리가 바다에 나가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섬들은 이런 지질학적인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데 일반적으로 수면 위로 5m 이상이 돌출되었을 때 이를 섬이라고 부른다.



산형(山形)과 섬형(島形)의 구별 방법

바다의 섬들이 이처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기에 수석 속에서 산형과 섬형을 구별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대륙도 같은 경우는 섬 안에 큰 봉우리와 평야, 평원까지 있어서 대륙의 정경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이런 점에서 때로는 수석에서까지 산형과 섬형을 따로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일까라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수석감상은 역시 돌이 지닌 성질이나 개성을 정확히 꿰뚫고 보아야 하는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을 없을 것 같다. 깊이 있는 감상을 위해서도, 분위기 있는 연출을 위해서도 그 본질이나 개성을 정확히 보는 일이 필요하다.


첫째, 돌의 변화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

? 깎아지른 벼랑이 있는가?

? 수문이나 동굴이 있는가?

? 배들이나 만(포구)이 있는가?

? 격랑에 씻긴 암층이 있는가?


둘째, 산세의 흐름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 산기슭이나 능선이 가파른가?

? 능선의 흐름에 단절감이 있는가?

? 산세가 작지 않은가?



셋째, 연출 후의 분위기를 본다.

? 좌대연출보다 수반연출이 잘 어울리는가?

? 모래수반보다 물수반이나 맨 수반이 더 잘 어울리는가?

? 연출 후 그대로 바다 정취가 살아나는가?


스스로 던진 위의 물음에 모두 긍정적인 답이 나오면 그것은 산형보다 섬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섬형 수석으로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연출 후의 정경을 유념하며 연출에 임한다. 연출이 끝난 후 전체적인 분위기가 얼마나 섬의 정취를 담고 있는가에 따라 섬형이 산형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를 한눈에 파악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략과 관찰이 따라야 할 것은 물론이다.


섬형의 수반연출

똑같은 돌이라도 형태가 무거운 돌이 있는가 하면 가볍고 얇아 보이는 돌이 있다. 또 우뚝 솟은 돌이 있는가 하면 낮게 깔린 돌이 있으며 변화가 많이 있는 돌이 있는가 하면 담담하고 차분한 돌이 있다. 거기에다 수반까지 낮은 것과 높은 것, 사각과 타원형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그렇다고 수반연출을 너무 어렵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음의 몇 가지만 유념하면 된다.

연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돌이 지닌 개성을 어떻게 살려내는가?’에 있다. 예를 들어 무거운 돌은 무겁게, 변화가 많은 돌은 더욱 변화가 두드러지도록 그에 맞게 수반을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돌이 지닌 풍정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하느냐에 있다.

예를 들어 섬이면 섬, 바위면 바위, 먼 것은 멀리, 가까운 것은 가깝게 보이도록 수반을 통해 살려내는 것이다. 이에 따라 수반이 두터워지기도 하고 얇아지기도 한다.



단층형의 감상 지름길


몇 개의 단을 겹쳐 계단 모양으로 단층과 넓은 평면으로 이루어진 것을 단층형이라고 한다. 이 돌은 점판암질인 석질(구들장류)에 층을 이룬 것이 많고, 따라서 단을 겹친 것 같은 형이 많다.

이 돌은 심미상의 관점에서 볼 때 그다지 좋은 모양은 별로 많지 않다. 그저 2개 이상의 단층이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깎아지른 듯 한 절벽 층계의 높고 낮은 변화, 평지의 넓이와 단애의 상태 등이 조화 있는 균형을 통일성 있게 갖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단석형의 감상 포인트는 각층의 변화미와 조화의 운치가 있어야 하므로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이 정형에서 벗어나 단순히 단의 변화만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유형의 것은 비교적 많이 발견된다. 단석은 그 단층의 모양에 따라 단층형과 절벽형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평석으로서 평평한 단이 겹쳐진 것은 단층형이며, 이에 비해 입석으로서 험난하게 단을 이룬 것은 절벽형이라고 한다.



단층형의 오묘한 경관

단석(段石)은 단을 형성하는 단 각각의 모양과 크기가 다르면서 상호 대조적이어야 하고 단의 높이 또한 별개이어야 한다. 그리고 단과 단의 경계가 분명히 그어져 있어야 한다. 이렇게 삼위일체가 조화롭게 이루어지면 구도상으로나 미적 관점에서 볼 때 명품임을 알 수 있다. 위의 돌은 상하 두 단의 모양이나 크기가 다르고 단과 단의 경계도 분명히 대조적인 변화미를 조성하여 명품다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점촌의 굳은 경질의 돌에서 이토록 잘 다듬어진 경정의 단석을 본다는 것은 축하할 일이다.

지질학에서 말하는 단층이란 해수의 침식 작용이라든가 지각의 변동으로 하여 큰 강기슭 가까이에 몇 개의 단락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수석에 있어서의 단층형도 거의 이와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각 단층이 각기 후박, 장단의 변화와 조화를 나타내고 있어야 바람직하지만, 대자연의 정경을 연상시키는 것이 목적이므로 비교적 시원스럽게 펼쳐 나간 것이 장관을 이룬 좋은 경으로 볼 수 있다.


절벽형의 웅장한 절경


드높은 암벽이 아득히 기세 좋게 솟구친 매우 뛰어나고 활기찬 경관을 보여주는 절벽석이다. 남아다운 기운과 박력이 시원스레 뻗어 올라가 한마디로 싱싱하고 시원한 경정을 느끼게 해 왠지 움츠렸던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다. 웅장하게 솟은 바위의 굳굳한 의지가 돋보이고 바위 기슭에 반듯하게 펼쳐진 멋진 토파의 균형미가 저절로 감탄을 연발케 한다.

천길 골짜기에 아찔하게 솟은 암벽, 해안가의 천야만야한 절벽, 평지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 똑 떨어져 나간 듯한 낭떠러지…동해의 촉석정 같은 절경을 연상케 하는 돌이다.


이 절벽형의 주안점은 단지 암벽의 날카로움만 가지고는 자연의 운치가 미약하다. 암벽의 높고 낮음의 조화 있는 균형이 있어야겠다. 아무리 천야만야한 절벽이라 해도 그 형태가 넓적한 네모라면 한번보고 버릴 돌밖에 안 된다. 암벽에는 위태로운 기운이 감돌아야 하고, 까마득한 느낌이 있어야 한다. 즉 절벽의 위엄과 웅장미, 앞으로 와르르 떨어져 내리는 듯한 드릴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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