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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 용어의 始原과 例話 (제 2 편)

高山 | 2007.08.20 07:52 | 공감 0 | 비공감 0

앞장에 계속 이어집니다.

 

 

                  

 

            수석 용어의 始原과 例話 (제 2 편)

                                                                       

                                                                                             고산 박 철 수

 

ⅲ 뿌리 내린 취미 수석문화

 

 

자연으로부터 미를 얻고 자연에게 대신 기쁨을 돌려주는 인간은 자연과 수수 교환 관계를 맺고 산다.

결국 사람은 마지막에 가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이치를 거역하지 않고 천체의 움직임을 살펴가며 무아 소요로 주유천하하며 자연과 가까이 지냈다.


그러다가 문득 손으로 자유자재하게 들 수 있는 돌멩이 하나를 향로나 책상에 올려놓고 형상의 기묘함이나 천체의 무궁한 조화를 발견하였고 속세를 벗어난 초연함을 가지기도 했다.

소위 석가산을 만들어 사악한 미물이 들어오지 않게 약초를 심고 돌을 갖다 세우며 심지어 호수까지 파서 자연의 오묘한 현상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경암사」 쇠북(瓊巖寺 銘 靑銅 金鼓)

사람은 눈으로 좋은 것만 보려하고, 귀로 맑은 음을 들으려 하고, 입으로 맛있는 음식을 선택하고, 머리로 아름다움만을 생각한 나머지 작은 돌멩이에서 까지 실경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내면세계까지 접근하고자 하는 욕구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우리가 수석을 취미문화나 내면세계까지 뿌리내려 과거에 이어 앞으로도 하나의 장르로 맥을 이어갈 수 있는 요체는 무엇이겠는가 ?

첫 번째로는 취미생활이란 여가를 활용한 정서적인 휴식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IT산업이 발달하자 행복권을 끝없이 추구하고 있는 현대인은 오히려 기계가 사람을 위협하고 있는 직면에 처해 있다.


숨통이 막힐 지경인 도시의 높은 콘크리트 벽과 산천을 위협하는 환경 파괴의 공해는 어디서나 공존하고 있어 가일층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각자 처해진 위치에서 걱정과 근심을 해소하고 맑고 깨끗한 문화생활을 즐기려고 한다.


건전한 삶을 터전으로 사회가 안정이 되자면 정서적으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이나 자신에게 합당한 생활의 리듬을 찾을 수 있는 개별적인 취미란 한 분야가 필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수석 취미는 여가를 활용해서 정서생활을 누릴 수 있는 우리 생활에 직, 간접으로 요구되는 최선의 혜택이다.
지금 현실에서 요구되는 바로 이런 점은 노동이나 개인의 가정에서 생기는 피로, 권태감, 압박감에서 해방됨으로써 자기 개발을 위한 필요한 공간이라고 할 것이다.

뉴우링거(Neuliger)가 여가를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하여 몰입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기쁨과 만족감을 부여받게 되며 개인의 존재의 깊은 내면세계와 관련이 되는 것이라" 고 정의하듯이 갈수록 정신적 피로가 누적되는 현대인에게 수석 취미는 정서적으로나 건강으로도 상당한 몫을 차지하였다.

두 번째로는, 중국과 일본 등 동양권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뿌리 깊은 애석사상을 간과할 수없다.
광활한 면적을 가진 중국은 자연을 배경으로 커다란 대륙문화를 이룩해왔다.


그 중 한 분야로서 산과 들, 평야와 언덕, 바다와 호수 등을 한 곳에다 총망라하여 볼 수 있는 대상물을 돌에서 찾으려고 한 흔적들을 여기저기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애석관은 동양인에게 뿌리 깊이 남아 그 맥은 역사상 전리품이 아닌 이정표로 맥이 이어온 것이다.

계우가 새겨진 아미타삼존불

세 번째로는 수석을 정신적 지주로서 道의 경지로 결부시키고자 하는 불교적인 사상이 다분히 깔려 있다.


더럽고 깨끗하고 좋고 나쁘다는 것은 모두가 긍극적으로 둘이 아니라는 中道觀이 불교사상이다.

“ 色卽是空 空卽是色 色不異空 空不異色 ”이란 (물질이 즉 공이요 공이즉 물질이며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고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느니라)불교의 우주관으로서,


色이란 우리 육체를 포함한 일체 물질 현상인데 존재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변해가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져 없어지게 되므로 색즉시공이요,

空이란 텅 빈 허공중에도 地. 水. 火. 風 四大의 원소가 있어 인연이 화합하면 만물이 생성하게 되는 기운을 머금고 있으므로 공즉시색이라 한다.

이렇듯 현실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은 나고 죽는 생멸을 거듭하지만, 일체법의 본질은 공이므로, 나고 죽음이 없는 불생불멸이라 일컫는다.


이러한 무상의 세계 속에서 영원의 세계를 희구하고자 하는 종교적 염원의 한 형태로 만고풍상을 이겨내 온 수석을 觀照함으로써 인간 내면의 無爲心 寂靜心을 깨치고자 하였다.

수석 역시 수억년에 걸친 인연의 화합으로 생긴 것으로 미래세에는 생명력있는 인연 화합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생명체와 다름이 없다 할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명체가 하나의 미의 대상으로 나타나기까지 자신 스스로 모난 부분을 둥글게 하면서 돌과 돌과의 마주침, 환경의 변화에 의해 갈라지고 쪼개져서 다시 뭉친다.


그리고 어느 시기가 되면 멸하며 다시 한 덩이리가 되었다가 떨어지는 순환의 과정을 거친다.

이른바 일체 현상은 연기에 의하여 변화하되 그 본성은 변함이 없는“是諸 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즉, 모든 법의 공한 모습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자연의 생멸 이치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따라서 수석을 통하여 단순히 관찰하고자 하는 차원을 떠나서 본질의 무한성을 동경하고, 무언, 부동으로 흔들림 없는 그 자태를 보며 내면세계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이어져 오게 되었다.

기영회도(耆英會圖)


○ 돌은 자연의 모든 사물중에서 가장 완비된 것이고 군더더기가 없는 것이다.

돌을 칭송하고 애착한 예는 무수히 많았다.
중국 육조시대 동진의 화가 고개지라는 사람은 바위에다 사람의 상을 그렸는 가 하며, 송대 미불은 거리를 지나가다가 이상한 돌을 만나면 무릎을 끊고 맏형으로 받들어 재배했다.

인간이 오래 전부터 돌에 대해 애착을 가진 이유는 어디에 있었는가? 돌은 나약한 인간에게 어떤 숭고의 대상으로 나타나 절대자와 같은 힘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변화무쌍한 현실세계에서 단시일 내 변하지 않는 불변성을 암시해 줌으로서 불의에 타협하지 않거나 군왕에게 절개와 지조를 지키면서 충성한 선비와 같은 높은 정신을 가르켜 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자체가 지닌 외적인 현상을 떠나서 돌이 지닌 견고성이나 변질되지 않는 동양 사상의 유교관에 의해 스스로 알게 된 선비들의 높은 식견의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돌은 자연의 모든 사물중에서 가장 완비된 것이고 군더더기가 없다.

괴석이든 매끈하든 갖은 풍상을 겪으면서도 가장 안정된 상태로 남아 온갖 군살들을 제거해 왔다. 약한 곳은 깍이고, 모난 곳은 다듬어져 더 이상 덧붙여지거나 모자람 없이 반듯한 선을 유지한다.

그는 거들떠 볼만한 형체도 없고, 색고 없고, 향기도 없으며, 과시하지 않고, 뽐내지지도 않는다. 오로지 냉정하고 적막한 모습으로 그렇게 있다.


항상 영원성. 불변성. 정제성을 가지고 적막 속에 싸여 있다. 적막은 사람의 마음을 상면에 끌어 들인다. 모든 것은 변하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라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에게 晩景의 美를 보여준다.

도 끼

晩景의 美는 평온하고 고적하고 맑고 아름답다. 이곳에서 한 개의 돌을 보면서 자연의 섭리와 인생의 의미를 느끼는 것이다.

(이 단원은 엉뚱나미 글 참고함)

ⅳ 수석의 내력
○ 중국의 수석 용어와 내력
최초 수석의 내력을 더듬어 올라가자면 지금부터 3,500년전 하서의 우왕" 편에 쓰이어진 괴석문화이다.


괴석은 즉 "괴이한 돌로서 임씨가 말하기를 괴석을 보낸 것은 퍽 괴이한 바가 있는 데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무슨 그릇으로 쓰는 물건을 더 돋보이도록 장식하는 데로 없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괴석은 꼭 패물감으로 보낸 것은 아닐 것이다" 기록되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객관적으로 검증하기 어려우나 장식용으로 쓰이어진 용도이외에 기이한 형태를 보려함도 기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수석에 대해 실질적으로 활발히 움직였던 시대는 당나라 때 당시 문장가나, 제상, 고관 대작등 선비들에 의해 기록된 문헌을 찾아 볼 수가 있다.

이 시대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이면, 우승유, 이덕유, 백낙천을 들 수 있다. 재상을 지낸 이덕유(787·849)는 수많은 돌을 집안에 들어놓고 갑.을. 병. 정 품수를 정해 놓고 애장했다고 한다. 이때 당인들이 주로 애장했던 돌은 태호석이다.

호수나 연못에서 산출되는 태호석은 석회석류로서 모양은 구멍이 나있고, 피부는 주름이 있고, 형태는 메마른 형태가 특징으로 그 당시 대부분 질이나 크기 보다는 형이 좋고 기이하면 상급으로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그후 송나라 때 와서는 구양수, 매요신, 미불, 두관 등이 소품부터 큰 것까지 완상했다.

당시 대 문장가이며 화가였던 미불이 상석법에서 수수투준의 요건을 설명한 것도 그 시대 사람들의 미적 감각을 대신해 주는 좋은 예시일 것이다.

중국에서 애석문화가 정립된 시기는 1,400년경인 명나라 때 와서는 드디어 애석문화가 정립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곧 두관이 쓴 운림석보이다.
운림석보는 상 ,중, 하로 저술되었다. 그 중에 기암기석을 130여 종목으로 분리해 놓았고 산지도 100여 곳을 소개하고 있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상권에는 영벽석. 임노석. 태호석. 구지석등 39개 수석류를 기록되었고, 중권은 어용석. 송화석. 마노석등 26종류를, 하권은 보화석. 종류석등 44개로 모두 109석 산지석을 그림없이 전하고 있는 고전지이다.


이 고전지는 당. 송대에 찬란했던 수석문화를 명실공히 서술화해서 기록한 최초의 애석지로 이 시대를 깃점으로 일본 애석문화의 태동된다.

○ 일본에서 쓰이어진 水石이란 용어
일본의 수석문화는 분석문화에서 시작되었다. 분석이란 분속에 모래와 여러 개의 돌을 모아서 일분 다석으로 연출하여 보는 방법인데 시간이 지나자 여러 돌을 같이 연출했던 방법을 벗어나 일분일석으로 바뀌었다.


수석이란 용어가 처음 쓰여 진 시기는 지금부터 110년 전 명치 시대인 1897년 일이다. 또 19세기 초엽 당시에는 고전 잡지인 은근지란 간행물에서 수석이란 용어를 들어 산수경석의 좋고 나쁨의 조건을 설명하였다.

그 이전인 1200년 경 명혜상인과 친란상인을 시점으로 승려인 몽창소석에 의해 분석문화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수석이란 독립적인 개념으로 정립된 시기는 이 시기이다.

이때 일본은 에도시대가 끝나고 봉건 제국시대를 벗어나 자본주의의 큰 물결을 타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근대화에 이른다.

그러나 수석계에 현대풍으로 디자인되고 가시화 된 시기는 지금부터 50여년 전인 1965년 분재계의 거장 촌전헌사와 그 아들 촌전규사가 수석 서적을 본격적으로 발행한 때부터 이다.


특히 촌전규사는 1,910년부터 이미 나온 수석과 관련된 책을 두루 섭렵해 가면서 원로들의 견해를 경청한 후 종합적으로 현대수석의 견해를 발표하기까지 했다.


그는 수석의 책에서 정의하기를 "형상의 기와 문양의 묘가 담겨 있고, 진석이나 기석과는 달라서 산수의 경정을 볼 수 있는 자연석 " 이라고 기술하면서 수석을 산수경석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형상석과 문양석까지 그 범위를 확대시켰다.

일본이란 8,000여개 섬으로 이루어진 섬나라이다.

미원계회도(薇垣契會圖)

때문에 자연에 대한 관상 초점은 섬. 암초와 바위 등을 배경으로 넓은 바다와 함께 연관된 물로 이루어진 돌로써 특히 물과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입석 형 보다 와석형을 좋아하며 외롭고 쓸쓸한 바다 풍경을 배경으로 한 원산 형을 즐겼다.


ⅴ 돌에 미쳤던 한국의 애석인
우리나라 고려시대 윤언민같은 경우는 이부상서로 높은 직위에 있던 자이다.
그는 만수정이란 별장을 지어 놓고 호의호식하면서 별장에 " 괴석을 모아서 가산을 만들고 정자는 누런 비단으로 벽을 입혀 더 없는 사치를 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전한다.

그 후 조선시대 정도전의 상봉집에 실린 석정기는 신창부의 애석생활이 적나라하게 그려있다.
그는 바른 말하기를 좋아하여 조정에 미움을 받아 관직에서 쫓겨난 선비이다.


밖에 나가 조금만 이상한 돌을 보면 큰 것은 수레로, 다음 것은 말에, 또 다음 것은 하인에게 주어 가져 왔다.
그가 주운 돌중에는 우뚝하고 가팔라 성난 표범같은 것, 양떼가 장난하는 모습같은 것, 물고기가 떼를 이룬 것, 등 다 적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예화로 본 애석사상은 돌을 보며 성난 표범과 같고 물고기 떼로 비유한 것은 모두 산수 경석이외에 형상석과 문양석도 확대해서 폭넓게 적용시켰음을 알 수 있다.


○ 조선말기 애석인의 예화

63년간 세도정치로 유명한 영안 부원군 김조순이 돌에 미친 예화가 있다.

정치는 관심도 없이 실정하고 있을 때 규장각 직각으로 있는 정원용이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어 "제발 돌사랑에 그만 미치시오" 과감하게 직설하였다고 한다.

김조순은 정원용을 회유하고자 경석 다섯개와 고서를 선물로 보내면서 회유책으로 시한수를 다음같이 썼다.
" 나 지금 돌사랑 병에 걸려서 아침 저녁으로 감상하며 즐거워하고 있으니 한 손님이 나에게 너무 미쳤어요, 화급히 다 털어버리고 정상으로 돌아가시오. 아무리 험준한 경석이라도 처마보다 낮으며 명산이라 좋아하지만 어찌 쓸모가 있으리오" 한다.

조선태조호적원본(朝鮮太祖戶籍原本)

나는 웃으며 아직 세상이치를 다 알지 못하도다 "남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려고 해도 방안 창문으로는 남산의 전경을 볼 수 없잖나" 라고 전했다.


그는 옥호정이라는 별장을 지어놓고 문인들과 수시로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탐관오리들의 뇌물이나 벼슬을 얻고자 하는 자들에게 온갖 보화를 챙겼다.

뇌물이면 원하는 지위를 다 얻을 수 있는 시대적 상황에 김조순에게 뇌물과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수석이었다.

그는 명석이라는 명석은 모두 소장할 정도로 그 당시 돌을 사랑했다고 전한다.

어느 날 김조순이 강원도 일대를 유람하다가 삼척지방을 들려 하룻밤을 묵은 일이 있었는데 이때 삼척부사인 권태웅은 시간만 나면 하인을 데리고 해석 탐석에 혈안이 된 때라 수석을 좋아하던 김조순이 관내에 머루고 있음을 알고 최고의 선물로 바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정조 당시 서해안 수군 첨점재사를 지낸 박윤묵(1771 - 1849)이라는 사람은

가야산, 월출산, 전북 마니산, 충남 계룡산과 서울에 도봉산, 청계산, 수락산등 전국을 유람하면서 무거운 것은 수래에 실고 가벼운 것은 손으로 집까지 운반해 놓고 큰 것은 정원에, 작은 것은 안방에 옮겨 놓고 즐겼다고 기록되었다.

그가 전국 사방을 헤맨지 50여년 세월을 보내면서 다음같이 돌을 칭송한 바 있다.
"어떤 돌은 스님이 좌선하는 같고, 기이한 생김새에서 고태가 묻어 있다. 신선이나 부처가 보다라도 놀래고 의심할 것이다.

나는 타고 난 돌 사랑 병, 뿌리가 박혔으니 나는 때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수집하여 모을 것일세...

오늘도 손에 들고 어루만지고 있으니 더 말하여 무엇하랴.. 휼륭한 산수 경석중에서도 수경형색을 사랑하다보니 내앞에는 모두가 절해 비경 다 모였더라." 고 긴 수석 시 한편을 지어 노래하였다.

고인돌

 

ⅵ 수석은 자연물의 하나이다.
자연석이 아닌 조석은 아무리 그 형태나 내용이 충실하다 손치더라도 그림과 공예품처럼 보려고 하는 단순한 미적 가치 외에 신비스러움이나 자연의 실체를 상징화해서 볼 수가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순수 자연물인 수석은 인공으로 만든 회화나 공예품처럼 어떤 미적 가치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요소를 가미해서 보다 한 차원 다른 의미로 승화된 교훈적인 개념이다.


그 형태가 모가 나고 설령 마르고 닮은 한이 있더라도 외부로부터 받게 된 눈, 비, 바람 등 가진 풍파를 감내하면서도 그 굳굳함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며 심석할 줄 아는 애석인에게 무언의 메세지를 던져주는 돌을 말한다.

끝으로 돌의 멋에서 차주환은 수석인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수석인이라는 말은“채석 취미만으로 치우친 애석. 애장가라는 뜻이 아니다. 요산요수하고자 하던 마음 본바탕의 욕구를 한 석괴(石塊)에 기울여서 그 뜻의 영원을 질상 가운데 바로 잡는 도로서 “돌을 사랑하는 이들”이란 뜻을 가진다.

이같이 수석인이라는 그 한사람의 본령을 상징하는 주석이 그 사람의 마음 자리에 터를 잃었거나 당초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라면 그사람은 다만 상품적인 돌을 차려 놓고 그것을 겉치레로 뽐내고 있는 속사(俗士)에 불과 할 것이다“

풍속화 중 고기잡이(風俗畵 中 漁場)


수석인은 산과 들, 바다와 강, 숲과 나무, 하늘과 땅이 어우러져 하나의 대자연을 축소한 산수경이나 사물, 형상을 닮아 있어 어릴 적 뒷동산에서 놀던 아련한 추억을 연상할 수 있는 등 사의적 대상물로서 예술적 가치를 발견하는데 그 묘미를 가지고자 한다.

그러기에 오늘도 내일도 그 숨소리에 매료되어 강과 바다를 찾아 조용히 집을 나선다.


참고 자료 :
1)조상제선생의 고전연구
2)박미선의 돌의 멋(차주환 편 등)
3)저 짙푸른 창공과 나는 하나라네(지광 作, 능인출판사)
4)http://blog.naver.com/snk8513 엉뚱나미의 심심동네
5)http://www.koreandb.net

* 부족한 점은 계속 보완토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산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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