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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편 문양석(紋樣石) 및 그 감상법

高山 | 2009.08.12 14:51 | 공감 0 | 비공감 0

 

 

문양석(紋樣石) 및 그 감상법

 

 

 

                     


천연의 명화가 그려진 문양석의 極致美! 자연의 조화가 돌 위에 그린 무늬인데 어쩌면 실체를 사진 찍은 듯 너무나 확연하다. 불타는 노을 온 하늘이 붉게 물든 석양 속에 산새 한 마리가 해지기 전에 어서 둥지에 가고자 바삐바삐 난다.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훨훨 날개짓 하는 모양이 너무나 흡사하여 실제로 바람 가르는 날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생동감이 돌 속에서 퍼득이는 것 같다. 새까만 몸체에 새하얀 부리가 하얀 차돌로 찍은 듯 박혀있어 새 모양에 더욱 실감을 준다.


문양석의 탄생

문양(그림돌)의 뜻

문양은 자연석의 석면에 천연적으로 무늬가 생겨 어떤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그 무늬결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주로 석영, 방해석 등인데 때로는 석회석도 있다. 특히 화석의 일종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무늬는 대체적으로 백색이지만 적색, 녹색, 흑색 등 다양한 색으로도 나타난다. 물론 어느 색이 가치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모암과 대비하여 문양이 색채적인 조화가 이루어니고 누구나 알아보기 쉽게 되어 있다면 된다. 단 그 무늬가 폭포나 계류를 나타낼 때에는 산수경석이 되며, 문양석으로 보지 않는다. 문양석은 산수경석 이상의 흥취를 대상으로 하는 문양의 묘를 감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상은 편하고 자유롭게

문양석 감상의 다른 묘미는 바로 부담 없이 가볍게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볍게 차라도 한잔 들면서 아무 거리낌 없이 감상하면 된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아무리 부담 없는 감상이라도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의 태도는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문양석은 너무 저속하지도 않고 깊이 심금을 울릴 수 있는 돌이어야 한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좋은 문양석의 조건

 

많은 문양 중에 우수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 미적요소에 의해 판단한다.


ㄱ. 정취의 상징과 연상

문양석은 우선 무엇보다도 감상자가 잘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달은 달로, 토끼는 토끼로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야 된다. 즉 문양이 어떤 정취를 반드시 상징해야 된다는 것이다. 매화라면 매화만이 갖는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난다면 어느 한 부분이 생략되더라도 무방한 것이다.

만월(滿月) 문양을 예로 들면 둥근 달 하나만 동그랗게 떠 있으면 달에 대한 흥취가 생기지 않는다. 그 달 밑에 뜬 구름이나 아늑한 산그림 또는 나무 등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풍부한 연상이 떠오르는 것이다. 즉, 감상자로 하여금 풍부한 연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문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ㄴ. 멋과 기품이 서려있어야 한다.

수석은 어디까지나 미적 감상 대상물이다. 그러므로 문양석에는 멋이 있고 저속성이 없는 문양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기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멋은 정서적인 정취가 함께 곁들어져 있기 때문에 선인들의 풍류에 비유되기도 한다.


ㄷ. 그림돌의 형태

문양석은 문양에 흥취의 주안점을 두는 것이기 때문에 돌의 형의 부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문양이 있으면 돌 자체의 형이 다소 나쁘더라도 수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형이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수석은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미적 대상물이므로 그 돌의 종합적인 감각에 호소하는 요소가 있어야 할 것이다. 바람직한 형은 안정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문양에 있어서는 형상석과 같은 빼어난 형태의 미는 없더라도 감상자에게 안정감을 줄만한 형을 갖추어야 한다.


그림돌의 구조

문양석에 있어서 항상 문제되는 것이 문양의 선명도와 구도이다. 선명도는 뒤로 미루고 구도에 대하여 설명한다. 먼저 문양이 측면이나 돌 상하 어느 구석에 위치하면 아무리 좋은 문양이라도 불안정함을 느끼게 한다.

다음으로 인물상에 있어서 인물이 석면의 여백을 향하고 있으면 구도상 문제가 된다. 반대로 여백을 등지고 있으면 불안정하고 답답하여 균형을 잃게 된다.


선돌(線石)이 입체예술의 최고봉이라면 문양석은 평면예술의 백미이다. 문양석은 선돌과는 달리 평면 위에 자연경관이나 사물의 실체, 추상적인 표현으로 인간의 상상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문양석은 평면예술에 불과하다는 제약 때문에 선돌에 비해 다소 등한시 되어왔으나 이제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돌의 문양은 ‘프레스코(Fresco)’ 화법처럼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아서 좋다. 천상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이 문양과 색채는 고분벽화에 남아 있는 인위적인 것에 비할 것이 아니다. 「동문선(東文選)」에는 天工이라는 말이 있고 <음양오행설>에는 神工이라는 말이 있다. 자연의 섭리는 인간의 영역을 떠나 신의 경지에 있다는 뜻이다.

수석은 사람의 손길에 의해 형질을 변화시킬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인공이 가해진 돌을 우리는 조석(造石)이라 부르며 낮게 취급한다. 좋은 돌을 만나는 순간 오랜 탐석과정에서의 피로가 한번에 풀리는 것도 ‘자연이 만든 수석’을 보는 묘한 쾌감 때문일 것이다.


담담하면서도 은은한 아취가 감도는 고구려 벽화의 색조는 우리 민족의 색감이 뛰어나다는 증거이다. 선조들의 이런 색감은 신앙과 생활 주변에는 자연이 있었고, 자연 가운데에는 갖가지 형태와 색을 자랑하는 나무와 돌이 있었다. 간단한 것 같은 문양에서 자연의 선과 색을 익히고 맑은 마음을 배우는 것이다.

 

문양석 중에도 특히 해석이 좋은 문양을 자랑하는 것은 물의 힘 때문이다. 바닷돌은 하나의 바위조각이 오랜 세월동안 수마에 시달리면서 동그랗게 변했다는 것을 잘 나타내준다.

물은 기체, 액체, 고체의 형태로 우리 눈에 보인다. 그런데 물은 움직임이나 변화 과정에서 열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특히 액체가 움직일 때에는 돌이나 모래 등의 부유물을 운반, 침전, 부상시킨다. 이 때 돌이나 모래는 물 뿐만 아니라 지구의 인력과 바람의 영향도 받는다.

 

이렇게 물과 바람의 힘에 의해 지표에 노출된 암석이 변형되는 것을 우리는 풍화작용이라고 부른다. 물이 이산화탄소와 산소를 포함하고 있을 경우에는 암석에 분해작용도 일어난다. 석회동굴은 물과 이산화탄소, 산소가 오랜 시간에 함께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암석을 변화시키는 요인에는 다음 네 가지가 꼽힌다.


- 산화 및 수화작용

- 용해작용

- 식물의 뿌리에서 분해된 산이나 박테리아의 작용

- 물의 운반 작용과 그에 따른 마찰작용


이런 작용을 받은 돌은 광물질 입자가 떨어져 나가 단단한 뼈대만 남게 된다. 파손된 부분은 수마되며 용해된 자리에는 물이 쉽게 침투하여 홈이 파인다.

 

 

紋樣石의 감상 향상 포인트


만추의 가을 황금 들판에 노란 金菊이 피었다. 황금빛 국화송이가 동글동글 짜임새 있는 멋진 배열로 무늬져 있다. 꽃송이들의 여유 있는 넉넉한 공간을 차지하고 새겨져 있다. 마치 한 폭의 화조도를 보는 듯 시원한 여백미가 감돌아 시 한 구절이 나올법하다. 이 돌에 꽃을 피우기 위해 자연은 그 얼마나 오랜 세월을 울었을까?

수석은 자연이 만든 신공(神工)의 작품이다. 돌 속에 나타나는 문양들은 조물주의 작품으로 그 조물주가 작은 돌덩이를 통하여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선사시대의 조각가가 돌 속의 그림을 통하여 표현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표현은 돌 속에 선각으로 남아있지만 신공은 채색문양과 선각으로 표현하여 그것을 돌 속의 그림문자로 승화시켰다.

신공이 그린 문양 중에서 인간이 해독하지 못한 것이 많으며 잘못 해독한 것도 있다. 우리가 즐기는 문양석은 선사유물의 암각화와 같이 신공이 조각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때론 화려한 문양의 색채도 있으며 단순한 선의 흐름만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또한 문양이 아닌 우리가 쓰는 문자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 수석인들은 이렇게 수석을 통하여 신공의 생각을 읽고 느끼며 우리의 정신세계를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문양석에 내포된 그림이 수만 년 전의 정신과 역사성이 있다면 그 무궁한 이야기를 읽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문양석의 소장자는 미술의 차원을 앞선 신의 마음이 표현된 세계에 어떻게 접근 할 수 있었을까.

 

문양석을 본다는 것은 소장자 내면의 미술관(美術觀)일 뿐이다. 신공과 인간의 예술적 심리가 일맥상통할 때 비로소 돌에 나타난 문양을 읽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흑백으로 나타나는 국화석이다.

밀양과 영천의 국화석은 화선지에 그린 듯 흰 바탕에 검은 문양이다. 밀양의 것은 세필로 그란 것 같고 영천의 것은 붓에 먹을 듬뿍 적셔 찍어낸 듯한 굵은 선과 점으로 보인다. 또한 우리나라 선사유적 암각화는 음각된 선으로 그려져 있다. 울산 염포와 주전돌의 핵문양과 구갑석은 이들을 닮아 음각으로 그려진 듯하다.

 

수석의 문양은 색깔, 음각 양각의 변화로 물씻김 돌에서 선명하게 발견된다. 돌에 나타난 인물석은 민초들의 얼굴이 많고 우리 이웃들의 얼굴을 닮았다. 다시 말하면 해학적인 삶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돌에 새겨진 얼굴을 보노라면 즐거움이 앞서고 그 외에 순수함이 보이는 돌을 보고 있으면 천공의 그림 대상에는 선한 사람들만 택해지는 듯 하여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문양석은 자연이 갖는 본래의 모습과 색상에서 신비를 찾아보고 자연의 참뜻을 감상하는 것이다. 돌에 새겨진 그림은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닌 조물주의 작품이다.

어쩌면 그림이 아니라 기예인지도 모른다. 어느 분류에도 소속시킬 수 없는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수석의 차원은 삼차원의 세계를 넘나드는 감상이 아닐까? 문양석을 접할 때 신공의 작품을 만드는 자세에서도 감탄하게 된다. 동양화에는 작가의 낙관이 있고, 서양화에는 사인이 있다. 문양석을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보아도 작가의 표시가 없다. 우리 민화가 작자미상이듯 문양석의 신공 또한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수석에 더욱 매력을 느끼게 한다.


문양의 아름다운 시정(詩情)

문양은 아름다운 색깔로 이뤄질수록 좋다. 그리고 돌의 표면색과 무늬 색깔이 서로 달리 뚜렷하게 나타나도록 색감적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회색 바탕에 검은 무늬가 들어가 있으면 색깔 조화가 명료하지 못해 좋지 않다. 검은 바탕에 흰 무늬가 새겨져 있어야 좋은 것이다. 다분히 회화적이면서 우아한 색채를 띠어야 품위를 높인다.

 

보다 중요한 것은 무늬 자체에 풍부한 시정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TV나 권총 따위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할 때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전혀 시정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온갖 자연현상의 운치가 돋보여야 한다.

어떤 물형의 무늬가 새겨져 있을 경우 소주병보다는 고려청자의 모습이 있어야 우아한 기품이 두드러진다. 시정을 느낄 수 없는 무늬. 색깔 조화가 초라한 무늬는 격이 떨어진다.

 

다음으로 무늬를 담고 있는 돌 전체의 윤곽이 구도상으로 잘 짜여져 안정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돌 표면의 알맞은 위치에 무늬가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어떤 무늬가 뒷면으로 돌아갔다든지 너무 한 쪽 구석에 있으면 바람직하지 않다. 가령 기러기가 날아가는 무늬에 있어서 머리와 날개의 일부분이 뒷면으로 감춰져 있다면 미흡한 것이다.


석면에 어떤 무늬가 나타나 있다고 무엇이든지 문양석으로서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무늬 자체에서 느낄 수 있는 자연풍취가 느껴져야 하며 자연현상과 계절감을 기조로 한 시정이 흐르는가를 보아야 한다.

단순히 괴상한 무늬가 나타난 것만으로는 수석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늬의 세계에 있어서의 이상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생략체(省略體)의 아름다움에 있다고 답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천연의 표현이기 때문에 자태나 도안 무늬가 완전하게 표현되어 있을 수는 없다. 그 불완전 속에는 그림으로 말하면 감필체(減筆體)라고 할까, 생략된 약동미 또는 유현미(幽玄美)라고 할까 이같은 것을 느끼고 맛보는 곳에 문양석 관상의 진미가 있다.



하얀 백양나무의 앙상한 가지가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다. 흑색의 담담하면서 은은히 아취를 풍겨주는 검은 바탕에 하얀 색상이 돌 속 깊숙이 파여 들어가 선미와 흑백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그 푸르던 나뭇잎 다 떨구어 버리고 지금 낙목한천의 앙상한 나목(裸木)이 되어 검푸르던 여름날을 그리워하는 듯 애처롭고 고독해 보인다.

모진 삭풍에 떨고 있을 엄동의 고목을 보노라면 갑자기 한기가 돌아 춥기까지 하다. 나무는 말없이 자신을 믿으며 살고 있으며 고독도 인내로 참을 수 있다는 공중인의 시를 이 무늬돌에 선물한다.


나무들은 그 언제나/ 저마다의 고독을 대하면서/

말없이 자신을 믿으며 살고 있다.

나무여, 나의 노래에/ 너와 같은 인내와 믿음과 기도를 주라.

- 공중인 <나무> 중에서

 

 

문양석의 감상기준


셋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고자 한다.

① 어떤 느낌의 상징으로 화(化)해 있을 것.

그저 문양이 나타나 있다는 것만으로는 관상의 가치는 없다. 당연한 바이지만, 억지로 둘러 붙이지 않아도 보는 이로 하여금 달이라든가 토끼라든가를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첫째 조건이다. 즉 그 문양이 어떤 느낌의 상징으로 화해있음이 바람직한 것이다.


② 풍부한 연상을 불러일으키게 할 것.

예컨대 꽃무늬라도 그저 수가 많다든가 모양이 크다든가 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매화꽃에는 매화꽃다운 자연의 모습이 나타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문양에 나타난 형태나 배색 ? 구도 등에 따라 풍부한 연상을 불러일으키게 해 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③ 미적관상물로서의 기품이 있을 것.

수석은 어디까지나 미의 대상물이다. 역시 아취라든가 기품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단지 진지하기만 한 문양으로서는 수석으로서의 가치가 낮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문양석에 있어서 형은 제이의(第二義)적이긴 하지만 역시 문양과의 관련에 있어서 이화감이 없고 안정된 느낌의 것임이 바람직하다.



문양의 감상법

문양석에는 그 무늬의 느낌에 따라 만상석(萬象石), 화문석(花紋石), 문자석(文字石)등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을 통틀어 말한다면 그 무늬가 기묘하다든가 무늬가 많이 새겨져 있다든가 하는 것이 감상의 요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요점이란 상징적인 표현으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풍부한 연상을 느끼도록 되어야 한다. 즉 무늬의 그림 새와 배색이 그 포인트가 된다고 할 수 있는데 회화적인 구도의 양부(良否)가 감상의 생명인 것이다.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서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테요/ ……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날 마냥 섭섭해 우옵네다/  김영랑 詩 「모란이 피기까지는」中에서


이토록 김영랑 시인은 땅 위에 하염없이 떨어지는 모란이 그리도 슬퍼 다시 모란이 필 때까지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겠노라고 애통하게 읊었다. 그 때 억만년이 지나도 지지 않을 이 모란이 있었다면…

문양석 감상에 주안점은 짜임새 있는 구도의 여부와 그림이 되는 무늬의 색깔이 선명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주는가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림과 바탕이 지닌 색의 대비, 거기에 따른 배색의 조화도 감상의 주요 포인트가 된다. 그리고 무늬를 담고 있는 돌 전체의 형태가 구도상으로 잘 짜여져 안정도를 유지해야 한다.

 

무늬 자체의 그림도 중요하며, 돌 전면의 형이 무늬의 안정을 베풀어 주는 형이라야 바람직하다.

그 다음 유의할 점은 무늬가 한 쪽으로 치우쳐지든가, 앞에서 뒤까지 무늬가 돌아가 그것을 보려면 시선이 앞면에서 뒷면까지 돌아가면 좋지 않다. 원칙적으로 문양석은 삼라만상의 온갖 형체나 꽃무늬 또는 문자가 새겨진 것을 말하나, 이러한 정형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추구하고 어떤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추상적인 문양석도 있다. 돌은 환상적인 무드가 감돌면서 항상 메마르지 않는 풍성한 시정이 흐르고, 어떤 동심의 세계 같은 것이 잠재되어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 무늬에 숨은 사연이 동심처럼 발랄하고 아름다운 꿈이 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밀어를 할 수 있게 한다. 이솝의 우화 같은 동심의 세계가 아름답고 귀엽게, 또는 익살맞게 되어 돌을 바라보노라면 자기도 모르게 푸르른 동심으로 돌아가 무지개를 쫓는 꿈도 탄생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돌은 환상적인 무드가 살아 있어야 한다.

 

다음은 문자체의 문양석에서 유의하여야 할 점이 있다.


① 글자가 누구든지 알아볼 수 있도록 씌어있을 것.

② 필세가 좋아 이른바 명필다운 느낌을 줄 것.

③ 전체의 구도에 알맞은 위치에 쓰여 안정감을 가질 것.


이상은 어디까지나 욕심이겠지만, 좋은 문자석을 얻으려면 위의 사항을 항시 유의해 두는 것이 좋겠다.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는 글자, 혹시 있다 해도 희미하게 나타난 글자라면 곤란하다. 또 필세가 없이 진기한 글자만 나타나 있어도 품위가 없어 좋은 것이 못 된다. 그리고 돌 전체의 형에는 자칫 무관심하기가 쉬운데, 앉음새의 안정감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또한 글자를 이루는 무늬가 도도록하게 튀어나와 입체감을 주면서 글씨의 획에 기세와 맵시가 있으면 더 바랄 나위 없다.

 

무늬에 상징적인 뜻이 있고, 회화적인 구도와 우아한 배색(配色)과 조화를 갖춘 문양석이란 좀처럼 찾기 어렵다. 대개의 경우 어느 한쪽이든 못마땅한 아쉬움이 있기 마련이므로, 어떠한 포인트에 중점을 두고 감상할 수밖에 없다. 무늬는 기품 있는 상징으로 잘 표현되었는데 색의 대비가 맞지 않는다든가, 반대로 색채의 조화는 선명하게 잘 나타났지만 구도가 맞지 않는다는 경우 등, 어느 정도의 부족함에는 포용력 있는 아량으로 기꺼이 보아주는 넓은 마음도 가져야겠다.


천연으로 神筆이 돌에다 영혼을 불어넣어 어질 인(仁)자를 석면 가득히 써 놓았다. 고풍이 감도는 누런 바탕에 검은색으로 씌어져 색의 대비도 맞는다. 그 필력이 평범한 인간의 서체가 아니고 신이 일필휘지로 혼을 쏟은 글자이다.

 

仁者樂山이라 예부터 어진 사람은 산을 즐긴다고 하였다.

‘산 속에 살면 가슴이 밝고 시원해 사물을 접함에 재미가 있다.’라고 채근담에서 말했듯이 어진 사람은 산을 즐겨 오염된 검은 마음을 맑게 씻었다. 착잡하던 마음 이 돌의 어질 인자를 조용하게 바라보면 자연의 품에 안겨 無念無想의 大道에 합일한 신선의 경지에 이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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