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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수석문화 인식

高山 | 2009.07.08 17:28 | 공감 0 | 비공감 0
백제의 수석문화와 역사인식
장동균 Date : 2007-02-26 13:19:16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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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글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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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간에 일기 시작한 愛石界의 뿌리찾기 운동은 수석 문화를 반드시 세우려는 애석인들의 바람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 또한 애석인의 한 사람으로서 미력하나마 애석 문화의 원류를 찾는 데 노력을 하여 그간 " 백제 영산석(靈山石)의 미로(迷路)"와 "박산향로(博山香爐)의 정체(正體)" 그리고 백제의 수석문화라는 글과 "애석풍류의 유적을 찾아서" 라는 영상물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 고대사에 대한 사학계의 연구적 난맥과 우리 스스로의 굴절된 역사의식으로 이런한 연구 결과에 대해 일부 수석인들이 확신을 갖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강대국이었던 백제의 실체를 백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박종숙(고대교수)의 백제 심층 연구서인 "백제, 백제인, 백제문화"를 빌어 기록상 세계 최초의 수석인 영산석을 일본에 기증한 백제의 고대사적 위상을 조명해 필자의 연구를 뒷받침하고 다시 한번 백제의 수석문화에 관한 글을 서술하고자 한다.


2.百濟史 연구에 따른 歷史觀

동아사아에 있어서 한국ㆍ 중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인ㆍ중국인이라는 민족은 고대와 중세, 그리고 현대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 해 왔다.

우선 고대에서도 상고대(上古代)로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이라는 나라 대신 은(殷)나라ㆍ주(周)나라가 있었고, 한국 대신 으로는 고조선ㆍ부여 등의 나라가 있었다. 그런데 은나라는 중국인의 조상이라는 화하족(華夏族)으로 이루진 나라였다기 보다 한국인의 조상이기도 한 동이족(東夷族)으로 이루어진 나라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중국 대륙의 하북성ㆍ요령성ㆍ길림성 등지를 차지했던 고조선을 한반도 북부에 국한시키고 반도 서북부를 차지했던 마한을 반도 서남부에 국한시키는 역사해석이 사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더 나아가 이른 바 정통 사학계 학자들은 백제의영토를 한반도 서남부로 국한시키고, 그 정치와 문화도 제 모습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약하시키고 축소시켜 놓았다.


물론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당나라의 입김이 세어졌고 이어서 송(宋)ㆍ원(元)ㆍ명(明)ㆍ청(淸) 등 중국대륙을 호령하던 강대국에 비해 한반도로 밀려난 신라ㆍ고려ㆍ조선의 입장이 상대적으로 약하되었던 점은 이해가 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멸망을 당한 백제의 역사가 사실 그대로 전달되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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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54호 무령왕능 왕금관식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백 년 동안이나 대륙의 남북 지역을 차지하면서 동아시아 문화를꽃피웠던 백제의 역사를 축소시키고 약하시켜 중국역사의 시녀 노릇을 시키는 식민사관(植民史觀)이나 그러한 식민사관을 그대로 받아들여 제것으로 삼는 우리의 사대사관(事大史觀)은 주로 중국인의 식민사관에 의해 심어진 것이 사실이다.

진(晋)대 이후의 중국 역사책에서 백제에 대한 두 가지 모순된 기록을 찾을 수 있는데 그하나는[백제왕의 사신이 조공했다], [백제왕이 表(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는 글)를 올렸다]등 이고, 다른 하나는 [백제가 중국 대륙에 식민지를 두었다].[백제가 중국 대륙의 OO 지역을 점령했다]등 으로, 서로 다른 두가지의 기록은 어는 한쪽의 거짓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쪽이 참이고 어느 쪽이 거짓일까? 연암 박지원의 말을 빌면, 우리의 시나 문장 속에 중국을 다른 나라 또는 먼 나라라고 쓴 부분이 있으며 중국의 역사가들이 꼭 황제의 나라 또는 큰 나라라고 고쳤다고 한다.

시나 문장들까지 이런 수모를 겪었다면, 우리의 정치ㆍ외교 문서들이 한인사가(漢人史家)에 의해서 어떤 취급을 당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백제가중국 대륙에 식민지를 두었다], 또는 [백제가 중국 대륙의 OO지역을 점거했다]와 같은 기록이 살아 남은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이는 당나라가 백제ㆍ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두 나라의 중국 대륙 점거 기록을 삭제하는 과정에서 양서(梁書), 송서(宋書), 주서(周書), 북사(北史), 백제전에 실린 백제의 대륙 점거 기록이 너무 간단했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았던 덕이다. 아무리 거짓 기록이 많고 참된 기록이 적다 하더라도 거짓은 거짓이고 참은 참이다.


양서ㆍ북사에 기록된 백제의 대륙 점거 기록이야말로 마치 진흙 속에 감추어져 있는 진주처럼 참되고 귀한 백제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사대사관은 중국인이 심어 놓은 식민사관 탓만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의 식미사관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대사관으로 정착시킨 우리의 책임이 더 크다. 중국의 역사책에 자기 영토의 일부가 백제의 식민지였다는 기록이 엄연히 있는 데도 그 기록을 애써 외면하고, 중국에게 유리하도록 고치고, 빼고, 깍고, 붙인 기록들을 비판없이 받아들인 사람들은 다름 아닌 우리의 역사가들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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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대향로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으로부터 비롯된 사대사관은 조선의 유학자들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으며, 일제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식민사관과 발맞춰 민족사관의 숨통을 틀어막는 역할을 충실히 해 냈다. 백제사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백제사의 연구의 원사료인 "삼국지(三國志)"ㆍ"후한서(後漢書)"ㆍ"진서(晋書)"등 중국의 역사책에 씌어진 배경부터 캐어서 바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삼국지를 쓴 진수(陳壽)는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삼한조(三韓條)에서 한(韓)ㆍ마(馬)ㆍ한(漢)ㆍ변진(弁辰) 등의 왕국이 한반도 남쪽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었는 데도 불구하고 벌써 2백 년쯤에 자취를 감춘 삼한(삼한)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 것이며 다음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를 쓴 범엽(范曄)은, 진수보다 150년 후의 사람이면서도 진수의 한조(韓條)를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에 새로운 사실이 하나도 없다.

그런 까닭에 진수의 삼한조(三韓條)가 비판을 받은 이상 새로이 문제될 것이 없다.


이들 "위지(魏志)"ㆍ"후한서(後漢書)"ㆍ"진서(晋書)" 등의 한(漢)ㆍ변진조(弁辰條)는 모두 백제ㆍ신라의 이름 대신에 마한ㆍ진한ㆍ변한을 쓰고 있는데, 마치 오늘날 중화민국이 1949년 중국 대륙을 장악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공산화 이전의 이름인 중화민국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니까 "위지(魏志)"ㆍ"후한서(後漢書)"ㆍ"진서(晋書)"ㆍ"통전(通典) 등에 기록된 마한ㆍ변진 소속의 여러 나라는 사실상 백제에 속한 성(城)과 읍(邑)이었고, 마한ㆍ변진 여러 나라의 우두머리로 기록된 臣智(엄치)는 성주 또는 읍장으로 임명된 백제의 왕족이었다.


마한과 변진이 곧 백제임을 증명하는 데는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자료가 있다. 즉 "위지(魏志)" 의 한조(韓條)와 변진조(弁辰條)를 보면 한(韓)과 변진(弁辰)은 다 우두머리를 신지라고 불렀고, 무기형태도 같았으며, 고깔형 모자도한과 변진에서 공통으로 썼다. 또 "위지"와 "후한서" 보다 늦게 씌어졌으면서도 "위지"에도 나와 있는 변진을 고의로없애고 마한과 진한만을 다루고 있는 "진서(晋書)"야말로 백제가 변진이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결정적 증거는 "위지(魏志)" 변진조에 나와 있는 ['변진 람'은 체구가 크고 의복이 깨끗하다]는 기록이 "양서(梁書)"와 "남사(南史)" 백제조(百濟條)의 [백제 사람은 키가 크고 의복이 깨끗하다]는 기록 같다는 점이다.


우리의 역사책인 "삼국사기"까지도 사대사관에 입각하여 특히 백제사에 먹칠을 했다. 김부식은 백제의 역사를 쓰는데 있어서 백제인이 쓴 백제사를 외면하고 중국인이 쓴 자료들을 그대로 끌어다 써서 백제사를 욕되게 했다.

즉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記)를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나 신라본기(新羅本記) 등과 비교하고 검토해 보면 연대ㆍ인명ㆍ직명 등이 서로 다른 곳이 많으며 신라본기에만 있고 백제본기에는 빠진 기록도 있는데, 이것들을 추려보면 수십 건에 달한다고 한다.


이렇듯 국내외 역사책에 의해 잘리고 찢겨지고 일그러진 백제사가 고고학적 성과에 힘입어 제모습을 조금씩 되찾고 있다.

저 유명한 공주 무령왕릉의 발굴과 거기서 쏟아져 나온 다채롭고 화려한 유물들을 비롯하여 복원하면 동양최대의 규모라는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의 발굴, 경기도 광주군 춘궁리의 건물터 발굴 등, 일일이 소개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고고학의 성과 덕택으로 백제의 역사가 차츰 옛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러한 고고학적 성과에 힘입어 국내외 역사책에 수록된 백제에 관한 기록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검토하는 일도 조금씩이나마 시작되었다.

삼한 가운데 가장 강했고 제일 문명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에서 가장주체적인나라의 하나였던 백제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하여, 지금까지의 무시되었던 백제의 요서군(遼西郡)ㆍ진평군(晋平郡)등의 식민지 건설 기록과 양자강 남북 점거 기록 등도 중시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국내외 역사책에 감추어져 있는 백제에 관한 자료들도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백제의 국호(國號)와 국조(國祖)에 관한 몇 가지 가설을 소개하겠다. 먼저 국호의 이칭(異稱)에 대해서 살펴보면 "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 마한조(馬韓條)의 마한과 "후한서(後漢書)"와 "동사연표(東史年表)" 등에 나타난 마한은 다 백제를 가리킨다.


또한 "위지(魏志)"에 나오는 한(韓) 역시 주로 백제를 가리킨 것이다. 왜냐하면 위지(魏志) 한전(韓傳)에 [한]이 [마한(馬韓)]ㆍ[진한(辰韓)], 그리고 [변한(弁韓)]등의 세 나라로 되어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변한]은[변진], 즉 백제였고 [마한] 역시 백제 온조왕 27년에 이어 백제에복속되었기 때문이다.

또 "부여융묘지문(扶餘隆墓誌文)에 따르면, 백제 의자왕의 왕족이 [진왕(辰王)]의 혈통을 이어 왔다는 뜻이고, 그렇게 되면 백제는 [진한]과도 다소 관계가 있다고 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백제를 [호(胡)]라고 불렀으니, "송서(宋書)"의 [남예주(南豫州)]에 관한 기록을 보면 [진나라 때 양자강 이남에 가 강성했다]는 구절이 있다. 백제가 동진(東晋) 이래 송(宋)ㆍ제(劑)ㆍ양(梁) 등의 남조(南朝)시대 동안 계속양자강 남북을 점거한 사실은 중국의 역사책에 나와 있는 엄연한 사실로, 그렇다면 [호(胡)] 역시 백제를 지칭한 것으로 볼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음 백제라는 국호의 유래에 대해서 살펴보면, 먼저 "북사(北)"와 "수서(隨書)" 백제전에 따라 백제라는 이름은[百家가 濟海했다], 즉 많은 가문의 사람들이 바다를 건넜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백제가 북중국의지명인 밝나루[맥진(貊津)ㆍ환진(桓津)ㆍ천진(天津)ㆍ백하(白河)에서 유래된 국호라고도 한다. 앞의 경우는 백제가 중국 대륙에서부터 바다를 건너 한반도를 뻗어 나오는 과정에서 얻은 이름이고, 뒤의 경우는 백제가 중국 대륙 요동 반도의 남부 지명을국명으로 함으로써 고조선과 부여의 뒤를 잇는 대륙 백제임을 분명히 하는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백제라는 국호의 유래가 어느 쪽이든 간에 백제는 분명 중국 대륙의 북쪽에서 건국됐고, 또 한반도로 내려온 이후에도 오랜 기간 식민지를 대륙 북부에 두었으며, 또 중국 대륙의 남부인 양자강 유역 까지 바다를 건너 점거했으나 이 두가지 유래에 다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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