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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불혹

빛고은 | 2009.06.24 16:13 | 공감 1 | 비공감 0

그녀의 불혹(不惑)

윤 은 주

21세기는 정보화 시대다.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나모 웹 에디 에이터, 포토 샵을 1개월 과정으로 배웠건만

처음 접하는데다 진도를 빠르게 나가다 보니 완전하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정보화센터에 다시 수강을 했다.

배웠던 것을 복습하는지라 나는 당연히 다른 수강생보다 빨리 이해했다.

수업이 끝나면 자연히 내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강사에게 물어 보기 미안했던지 같이 배우는 입장인 내가 편했던 모양이다.

수강생 중에 유독 내 눈길을 끄는 사람이 있었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 풀어진 퍼머머리는 제대로 빗지고 않고 늘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옷은 무채색에 우중충한 바지 차림에 빛 바랜 청자켓을 걸쳐 입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었지만 오십대 중반쯤 되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녀는 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일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기계치라 이해가 되지 않아 늘 엉뚱한 질문을 해서 젊은 강사를 난처하게 했다.

인간 관계에서 생무지인 나는 그녀에게 먼저 말을 트고 싶었다.

번번이 강사에게 무안을 당하면서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질문이며,

어렵게 컴퓨터는 배워서 어디에 쓸건지.

술멍한 외모와는 달리 붙임성이 좋은 그녀가 내게 말을 텄다.

그녀의 나이가 마흔 아홉. 사십대 끝자락에 서 있다는 것도 알았다.

어느 날 그녀는 눈이 부어서 나타났다.

울어서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왜 울었냐고 물어 보았더니

초등학교때부터 짝사랑했던 동창생을 잊어버리고 감정 정리를 하느라고 그랬단다.

사랑이란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냥 지나가는 말. 아니 장난치려고, 분위기 한 번 바꿔 보자는 요량인 줄 알았다.

그녀와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위로를 하고 있었다.

잊어버리라고 옆에서 사운거리고 있었다.

“거짓말이겠지?”

내 말에 친구는 정말이라고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지천명을 바라보는 그녀가 짝사랑으로 가슴앓이를 하다니.

그녀가 자신의 사랑을 소회한다는 것은 같은 또래의 우리들에겐 분명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내 삶에도 반전과 활기가 필요하다고 일탈을 한 건 더군다나 아니었다.

우어덩더우덩 살다보니 언제 진정 그녀 자신이었던 적이 있었는지.

그녀가 원하는게 무엇이었는지.

그녀 스스로 감정에 충실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칼릴 지브란은 “보이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라고 말했지만 초승달이 반달이 되듯 조금씩 커지는 마음속의 사랑이 참된 사랑이 아닐까.

조용히 왔다가 혼자서 가슴앓이 해야 하는 그녀의 사랑도 사랑의 한 방법일 뿐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우리가 감히 열정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녀의 짝사랑에 찬사를 보냈다.

불혹.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말라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한 평생을 살면서 사십대에 가장 유혹에 노출되기 쉽다는 말 일게다.

불혹이란 말을 세상에 제일 먼저 내어 놓은 이는

어쩌면 제 유혹을 감당할 길 없어 미리 연막을 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누군가의 말을 실감하지 않았던가.

이십대도 삼십대도 아닌 사십대에 사랑이라니.

유혹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린 줄 알았다.

물이 살며시 종이에 스며들 듯 그렇게 소리 없이 천천히 찿아 온 감정 때문에

숨어 있던 그녀의 마음이 자맥질하지 않았던가.

흔들림이 없어야 할 불혹에도 열정, 사랑, 미련 같은 단어들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버림의 지혜를 깨우치지 못하는 내 마음 때문일 것이다.

연휴 휴강을 하고 월요일에 만난 그녀는

다시 예전처럼 명랑하고 예의 그녀 특유의 푼수끼 넘치는 언어로

딱딱한 강의실 분위기를 웃음 바다로 만들어 놓았다.

열정을 다스리는 그녀의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2003년4월 (공저'살아가는 날의 노래2'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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