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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의 스케치

빛고은 | 2009.06.24 15:44 | 공감 0 | 비공감 0

눈 오는 날의 스케치

윤 은 주


인터넷 여행을 하다 보니 곳곳에서 첫눈이 왔다는 멘트가 보인다. 2004년 서울에 첫눈이 내렸단다. 소문으로는 아주 잠깐. 보일 듯 말 듯 눈발이 흩날렸다는데. 나는 보지 못했으니 첫눈으로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어제 일기 예보엔 눈이 온다고 했지만 아침부터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바람은 왜 이렇게 사납게 불어 대는지...

아직도 가을 끝자락을 잡고 있는 내게는 바람 덕분에 칼날 같은 추위를 느껴야 했다. ‘삐삐’ 문자 메시지가 들어 왔다.

“오늘 눈 왔었니? 눈 온다고 그랬었는데 안 보이네.”

“보이는 것만 믿어.”

친구도 첫눈을 인정하지 말자는 공범자로 만들기 위해 나는 단호하게 회답을 보낸다.

눈은 자연이 펼치는 경이감중의 하나다. 눈이 지상으로 내려와 그다지 오래 머물러 주지는 않는다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 쌓여서 눈다운 면모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오늘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소리 없이 가버리니 첫사랑의 이별처럼 허망하기만 하다.

올해는 눈이 많이 오고 포근 할거라는 기상대 예보와는 달리 서울에서는 그저 풀풀 날리다가 녹아 버리는, 눈다운 눈은 못 본 채 지나갔다.

영동지방이나 남부지방에 내린 폭설을 TV 영상을 통해서 설경을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눈은 아예 포기하고 3월의 문턱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들을 때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무심코 창문을 열다가 도둑눈(밤사이 사람들이 모르게 내려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눈)을 보았다. 쌓인 눈 위에 눈은 오전 내내 속절없이 내리고 있다. 눈 내리는 모양새를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그리움은 팝콘처럼 부풀어오른다.

젊은 날의 눈들은 칼날처럼 차갑거나 때론 지독하게 뜨거웠다. 눈의 차가운 물질적 특성과는 달리 사람들은 눈이 따뜻하다고 느낀다. 눈이 만들어 내는 공간의 느낌이 그렇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눈이 내리는 장면 안에서 만날수 있었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눈들의 빛깔과 표정들이 아직도 내 안에서 숨쉬고 있다.

눈이 내린 모양새에 따라 느낌 또한 다르다.

눈이 밤새워 내려 아침에 소복이 쌓인 하얀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선물을 한아름 받은 기분이다. 희뿌옇게 흩날리면서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마음 저 편에 꼭꼭 숨겨져 있던 온갖 자잘한 상념들이 고개를 내민다.

눈오는 날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아버지다. 내가 중학교 시험을 치던 날 눈이 엄청나게 쏟아졌다.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각별해서 그 날 아침에 아버지는 유난히 손발이 찬 딸을 위해서 운동화와 장갑을 아랫목에서 내어 주셨다. 이른 퇴근을 하신 아버지는 약주를 드시고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로 가셨다. 당신의 맏딸이 중학교에 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좋으셨던 아버지. 눈이 하얗게 쌓인 운동장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신 그 모습은 낡은 흑백 사진의 선명함으로, 눈오는 차창의 와이퍼처럼 내 마음속에서 왔다 갔다 한다.

눈바람에 추울까 남편의 목에 목도리로 단도리 해서 출근을 시키고, 스무살이 훌쩍 넘어버린 두 아들 옷을 단단히 입혀서 보내는 내 작은 마음은 아마도 아버지의 눈처럼 포근한 마음을 닮아서일까?

눈이 오는 날이면 나는 어디론가 돌아다니고 싶은 충동에 갈 곳이 마땅찮아 서점에 간다. 서점 가는 길은 대로변을 피해서 아파트 사이사이 골목길을 아주 천천히 걸어가면서 나름대로 눈오는 풍경을 감상한다. 이 책 저 책을 뒤적여 보다가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사들고, 왔던 길을 다시 돌아온다. 눈오는 날의 나만의 감정 조절 법이다.

영화 ‘러브 스토리’에서 눈장난(snow frolic) 음악과 함께 연인들이 개구쟁이처럼 눈밭에서 뒹구는 순수한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다.

온 세상에 순백색의 눈이 내리는 시베리아의 바리키노 대설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닥터 지바고’는 눈 내리는 아름다운 장면과 함께 지바고와 라라의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에 눈꽃처럼 눈물을 떨구게 만들었다.

안톤 시나크는 ‘무성한 나무 위에 떨어지는 백설이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고 했다. 나이테에 또 한 살을 더 했다. 나이는 숫자적 의미에 불과 하다지만 나이 듦이 서글픈 것이 아니라 겉모습과는 달리 마음은 사춘기 소녀의 그것처럼 변하지 않음이 더욱 슬픈 일이다.

세월은 슬픔보다 크다. (공저: '살아가는 날의 노래1'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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