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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린다는 것 혹은 기억한다는 것

빛고은 | 2009.06.24 13:31 | 공감 0 | 비공감 0

잊어버린다는 것 혹은 기억한다는 것


윤 은 주


"신이 인간에게 준 최대의 선물은 망각이다."

망각. 사전적 의미로는 잊어버림 또는 경험하였거나 학습한 내용의 인상이 사라져 그 기억을 되살리기 어렵게 된 상태를 뜻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잊어버리고 싶은 것. 즉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는 반면 영원토록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은 사연도 많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망각의 세계로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것들은 뚜렷이 남아 시도 때도 없이 내 머리를 접접거리고, 간직하고 싶은 것들은 시간에 비례해 사그라진다.

지금도 독일어 시간에 배웠던 하이네의시 "아름다운달 5월에"는 원어로 외울 정도이고 "청춘 예찬" "낙옆을 태우면서"와 같은 잊혀지지 않는 수필이나 내가 좋아했던 시 "꽃"(김 춘수)이나 "목마와 숙녀"(박 인환)는 완전히 다 욀 수는 없으나 인상에 남는 부분만은 곧잘 읊조리곤 하는걸 보면 나도 기억력이나 암기력은 꽤 있다고 자부를 해 오던 터였다.

나의 컴퓨터처럼 정확한 기억력도 불혹의 나이를 지나면서 서서히 퇴화하기 시작함을 스스로 느끼기 시작했다.

가스불을 껏는지, 중간 밸브는 잠갔는지, 화장실 전기 스위치는 내렸는지 이런 사소한 것들에서부터 중요한 문서나 통장을 찾느라 하루 종일 끙끙대는 횟수가 늘어간다.

주변 사람들이 불안할 정도로 며칠을 두고 찾다가 스스로 포기해 버리고 나면 엉뚱한 곳에서 불쑥 튀어나올 때는 화보다는 반가움이 앞서면서도 가족들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나의 이런 잊어버림에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기억하면 용량 초과의 내 두뇌의 하드웨어가 터져 버릴지도 몰라 미리 잊어버리는 복이 내게 왔는가라고 부질없는 생각을 하면서 언제가부터 중요한 일정이나 집안 대소사를 메모하는 습관이 새로 생겼다.

가까운 슈퍼에 생필품을 사러 갈 때도 머리 속에 암기만 했다가는 꼭 한두 가지를 빠뜨리곤 해서 낭패를 본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조직 사회에서는 나와의 이익을 머리 속으로 저울질하고 또 상하의 구분이 뚜렷해서인지 예의나 격식을 차리곤 하지만 혈연으로 맺어진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조직이든, 혈연이든 인간 관계라는 것이 저축해 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소에 잘다져 놓지 않으면 서로의 감정의 골이 깊어 앙금으로 남게 된다.

남편이나 아내, 부모, 자식간에도 물론이거니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맺어지는 또 다른 가족 관계에서도 윗사람이라고 해서 자신의 입장을 고집하며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어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여자의 경우 결혼이란 거대한 인생 관문을 넘어서서 이루어지는 시댁과의 인간 관계는 첫 단추가 대단히 중요하다.

고부 갈등, 시집살이는 한국 사회에서 영원히 풀어야할 명제이자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할 과제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외아들인 남편과 홀 시어머니의 돈독한 모자 관계 사이로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너무 좁았다.

“어머니 때문에 나 힘들어.”라고 내 속마음을 남편에게 드러내 놓는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시어머니 모시고 철없는 막내 시누이와 함께 이십여년을 살아 오면서 잊혀지지 않고 내 가슴에 응어리져 풀지 못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몇 년 전에 어머니와 작은 아이와 셋이서 늦은 아침 식사를 하다가 눈동자가 풀어지고 입이 돌아가면서 정신을 잃으시고 어머니는 쓰러지셨다.

병원으로, 한의원으로 어머니 모시고 정신 없이 다녔던 그 날.

한의원에서 침 맞으시고 몸을 추스르시던 어머니를 보는 순간 내 마음 속에 응어리져 있던 어머니에 대한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이 다 사그라져 버렸다.

용서는 피해자측의 몫이고, 기억은 가해자측의 일이어야 한다는 내 고정 관념도 무너졌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그 무엇이고 싶다."

김춘수님의 "꽃"에서처럼 나와 인연되어진 모든 이에게 잊혀지지 않는 오래도록 기억되는 향기 나는 사람이고 싶다.

공저: '수다도 약이다'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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